한줄 詩

내 가을의 고물자전거 - 이강산

마루안 2017. 12. 12. 21:43

 

 

내 가을의 고물자전거 - 이강산

 

 

여행의 쉼표를 찍듯 잠시 다녀가는 부곡하와이
9월 19일 오후....
이쯤에서 슬그머니 가을이 오곤 했었지
시간의 길목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낙엽을 밟는다, 처음 밟아본다


그래, 그러고 보면 내 가을은 종종
아주 오래 전 가을의 낌새를 눈치 챈 나이로부터 지금까지
오늘처럼 '낙엽을 처음 밟아본다'는 독백에서 시작되었다
내 가을은 또
발바닥에 밟히는 낙엽의 분량만큼
두툼해졌다가 얇아졌다


말하자면 나의 가을은
독백과 발바닥으로부터 마흔 번쯤 오고 간 셈이다


낯선 거리에서 불현듯 마주친 가을 때문에
길 잃은 사람처럼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이대로 가을이 깊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불암감으로
낙엽 몇 잎은 피해간다
장수풍뎅이는 아닐 텐데, 길바닥에 말라붙은
곤충 한 마리도 비껴간다


물웅덩이를 빠져나가듯
뒤뚱거리는 부곡하와이 길모퉁이
오후 세시....
불쑥 자전거를 들이밀고 천 원짜리 효자손을 흔드는 여자


가을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친 여자의
싸구려 효자손을 사지 않기로 작정했다가
효자손을 팔아야만 한 끼를 해결할 듯한 여자의 눈빛 때문에 멈칫거리다가
아 자전거....
고물자전거를 발견하곤 효자손을 낚아채듯 사버린다


지폐와 효자손의 물물교환이 끝나기가 무섭게
삐거덕삐거덕 굴러가는 고물자전거


그래, 그러고 보면 내 가을은 때때로
아주 오래 전 가을의 발소리를 알아들은 나이로부터 지금까지
오늘처럼 고물자전거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금산 중앙시장 앞 시장골목을 누볐던 아버지의 자전거....
내 기억의 심연, 첫 가을이 그랬다
인동 시장 천일미곡상회 고무부의 자전거는
이 순간 어느 구멍가게인가를 향해 씩씩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덕암동 처갓집 고물상 마당에 낙엽처럼 널려 있을 자전거
고물자전거


밟히는 대로
그냥 밟히는 대로 낙엽을 밟는다
9월 18일, 부곡하와이 거리에서
내 가을의 고물자전거를 졸졸 따라가며

 


*시집, 물속의 발자국, 문학과경계

 

 

 

 

 

 

내게 닿지 않는 모든 것* - 이강산

 

 

영산홍이었다가

까치밥이었다가


일 년 동안 바라만 보다 일 년 만에 딱 한 번 맞잡고 놓아버린 손이었다가

손과 손 사이를 빠져나간 황혼이었다가

 

한 숟가락 남은 밥그릇처럼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리움이었다가

 

약속한 사람과 턱없이 일찍 헤어져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혀 있는 마포구 망원2동의 신호등이었다가

신호등 없이 걸어가는 낮달이었다가

 

 

*신현림,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에서 인용

 

 

 

 

 

# 이강산 시인은 1959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母港>이 있다. 소설가, 사진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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