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절초 - 이수익

마루안 2017. 12. 12. 21:25



구절초 - 이수익
 


저 꽃잎이며 잎새들
퇴색으로 무너지는 가을 들판에
저만 홀로 하얀 소복으로 서 있는
구절초.


죽은 내 친구의 마누라쯤 되나?
마주 대하기 난감한 거리를 두고
새하얀 슬픔으로 정갈하게 정장한 채
눈물 나는 이 계절의 문간 앞에 서서
다소곳이 고개 수그리며 날 마중하는,


아,
꼭 그런 문상길 같은
어느 가을 아침.



*시집, 꽃나무 아래 키스, 천년의시작








폐허의 노래 - 이수익



이리 오시라


와서
천 년을 마모된 내 얼굴이며 손발,
몸뚱어리를
눈으로 보시라, 손으로 한 번쯤 만져보시라


문둥이처럼,
흡사 문둥이처럼 문드리진 내 코며 입술,
눈두덩이며 귀, 그리고 뺨을
가까이 다가와서 만져보시라


더러는 팔이 부러지고
더러는 목이 부러진 채
천년을 어느 외진 산자락에 서 있어도
나는 너그럽게
가녀린 미소 하나로 영원을, 영원을 품고 있어라
그러길래.....


오늘은 마음 상한 이여
그대는 하루쯤 경주 남산으로 와서
깊이 나를 보시라, 문드러진
불화(不和)의 내 육신 옆에 서거나 누워


잊으시라, 저 미물(微勿) 같은 세상 온갖 희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