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녕하신가, 나여 - 류흔

마루안 2017. 12. 11. 17:46

 

 

안녕하신가, 나여 - 류흔


그때에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
내 고독을 말리려고, 그의 양지를 빌리지는
말았어야지
여태 갚지 못한 그의 빛을
빚처럼 안고 사는 나여
산다는 것을
무엇으로 견디는지
밤새 뒤척인 잠과 뒤적인 꿈으로
머리맡 갈증은
벌컥벌컥, 화를 내고
그래
밤새 안녕하신 이들 속에 내가 있었구나

흔치 않은 그가
쓰윽 돋아난 거울 속에 턱을 올려놓고
면도날을 박아넣거나 거품을 닦아내거나
새로 돋아난 새치를 뽑거나
수십 년 빚어놓은 얼굴을 돌보면서
얼핏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무엇으로 견디며
참 기적으로 살아왔는지

살아갈지

 

 

*시집, 꽃의 배후, 바보새

 

 

 

 

 

 

자화상 - 류흔

 

 

이미 늙기 시작한 시간을

나는 외면한다

노쇠한 시간은 세월 탓이라고,

내가 겪어온 설움 때문에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울 앞에선 반대로 앉아 있는 사람아

어이, 오른손으로 알은체하면 왼손을 드는 사람아

역(逆)으로 걸어온 사람아

내가 날 속이고 살아온 사람아

무엇을 더 속이고 살려는가

팍!

깨진 거울 조각, 조각 속으로 뿔뿔이 숨어드는

 

아, 인간아

 

 

 

 

*시인의 말

 

무슨 곡절을 견뎌 예 왔습니까

소회를 말하시라면, 이렇습니다

죽은 시늉을 해도 물어 죽이는 곰처럼

흘러간 이야기나 동화는 없었습니다

하루살이의 평생이 하루였듯이

흘러간 수십 년도 문득 하루였습니다

다시 올 수십 년 후에도 오늘 같은 하루가

그런 하루가 닥치겠지요

문맹이 아니라면 읽어야 하고

눈물이 남았다면 울어야 하고

살아 있으니 사랑을 구했던,

사랑을 구하다 그 사랑을 울게 했고

그 사랑의 눈을 짓무르게 했던 시절과

뉘우침조차 사치였던 어제를 생각합니다

아직은 아무래도 좀 이른 것이지만

나를 풀어놓은 세상에서 내가 불려갈 세상으로 옮겨 앉는 때

잠들어 있음과 숨쉬지 않음이 같은 뜻일 때

다시 기록해야 할 후기가 안타까워

어떤 곡절이든 견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잎사귀를 또르르 구른 물방울이 뛰어내리듯이

그간 거느렸던 꿈들은

영원한 잠 속으로 뛰어들겠지요

 

아아, 꿈마저 불러내지 못하는 잠 속에서

다시 기록해야 할 시간이 두려운 24시,

다시 기록해야 할 세월이 두려운 365일,

강산이

또 바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