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 류시화

마루안 2017. 12. 6. 19:24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 류시화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 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삶이라는 것이 언제 ~ 마모시키는 삶' - 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에서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문학의숲


 




 


꽃 피었던 자리 어디였나 더듬어 본다 - 류시화



꽃을 꺾자 꽃나무의 뿌리가 어두워진다
꽃나무는 얼른 다른 꽃을 밀어 올린다
스스로 환해지기 위해
내 오른쪽 늑골 아래
환하게 밀어 올려지지 못한 꽃들이
수북하다
누가 저곳에 저리도 많은 꽃 버렸을까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것들 너무 많아져
마음 걸 곳 찾을 일 참으로 없어
오래되었구나
어느 생에선가 마음 한 번 베인 후로
꽃의 안부 묻지 않은 것이
늑골의 통증이 그냥 통증이 아니었지만
오늘 밤 꽃이 바람에 스치는 것
꽃 지는 의미 알라는 것 아니겠는가
꽃 피었던 자리 어디였나 더듬어 보라는 것






# 얼마쯤 지나야 떠나간 사랑을 잊을 수 있을까. 사랑은 변한다고 믿으면서도 지난 사랑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