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우울한 사랑이여 - 김이하
가라, 사랑이여
너를 사랑했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었다
슬프고 우울한 밤을 지샌
어둠 속에서 팽나무 뒤로 하고
너를 돌아보는 새벽
거짓이었다
사랑한다 말했던 것은
내 안에 가득 고인
슬픔의 도착
켜를 알 수 없는
거짓의 지문들
나는 아무것도
나의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이미 사랑이 지나간 하늘엔
또 다른 구름의 흔적
아스라이 비끼고
사랑, 흔적 없이
긴 지평선 끝에서 바람 분다
한 올의 먼지까지도
너다
나는 바람 끝에서 야위어 가는
지평선이다
내가 지워 버린 풍경
그게 너다
*시집, 타박타박. 새미
바람개비 - 김이하
몸은 돌아섰으니
마음만 가 버리면 될 성싶었다
팽나무 가지 끝에 머물던 바람도
이젠 내 길을 따라붙고
오로지 당신을 버리는 일
마음에 불을 삼키고 태워 버리는 일
활활활 불꽃 속을 걸어 나와
빈 몸으로 세상을 가면
그만이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얄팍한 세상
빈자의 마음이 아니었겠나
어디, 그 마음
돌아선 적 있으리
몸은 돌아섰지만, 몹쓸 마음
바다에 띄운 적 있으리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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