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전생의 이력 - 김추인

마루안 2017. 12. 6. 18:40



전생의 이력 - 김추인



다 한때는 바싹 마른 가랑잎이었던 게다


혼자서도 중얼중얼 두런거리는 것이
밟히면 바스스 잎맥들 부스러지며
제 늑골 아래 울음을 숨기는 것이


다 한때는 한뎃잠 자는 노숙자였던 게다
집을 두고 떠도는 것이
누덕누덕 시간의 옷 있는대로 걸치고
바람 길을 따라 모래의 땅 굴러다는 것이
돌아갈 생각에도 귀가를 미루는 것이


나 한때는 개, 상갓집 개였던 게다
동쪽 구린내에 짖고
서쪽 흐린 물통 엎어버리고
마음이 어린 비리고 떫은 것을 찾아
울 것들을 찾아 짖을 것들을 찾아
선선히 웃어주는 것이
선선히 울어주는 것이


허공 속 둥지는 꿈꾸는 나 한때는 바람이었던 게다



*시집, 오브제를 사랑한, 미네르바








지상의 마지막 이상주의자 - 김추인



제 안의 모래밭을 걸어가는 이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천천히 걷는다 천천히 눈을 뜬다
눈을 감으면 열리는 소실점 바깥
상자 바깥을 내다보는 이


똥을 누며 밤이 걸어온 행로를 짚어내는 데
골몰하는 이,
수메르 토판을 해독해야 하는
존재한 적 없는 시인의 토씨를 찾는
세상의 처음으로 가야 마땅하다는
먼지의 세월을 뒤지는 이,
안장도 없는 말 잔등에 거꾸로 앉아 달리는
사유의 족속이 있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지상의 마지막 헛꿈을 꾸는
이들의 허무를 읽더라도 탓하지 말기를
해석이 불가능한 보법에 이의 달지 말기를
고쳐주겠다 애쓰지 말기를


이토록 다르고 모자란 이마저 멸종하고 만다면
세상의 저녁을 누가 울어줄 것인가





# 오랜 기간 시를 썼지만 김추인 시인은 내가 비교적 늦게 알았다. 그래도 꾸준하게 시를 찾아 읽다 보니 늦게라도 만날 시인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가 보다. 어쩌면 예전에 읽었으나 그냥 지나쳤다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가랑잎 같은 인생에서 시 읽는 날들이 고맙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