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삶의 전부이신 막막함이여 - 이승희

마루안 2017. 12. 6. 18:52



내 삶의 전부이신 막막함이여 - 이승희



막막한 마음들 데리고 길을 나선 적 있지. 푸르고 맑은 것들의 빛나는 이마를 바라보며 골목을 하루 종일 헤매다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시든 잎처럼 앉아 있곤 했어. 여기가 사막이군. 무수한 도시의 사막은 그렇게 발견되었던 거야. 손가락 가득 모래가 빠져나가고 나면 거대한 모래 무덤이 더이상 갈 데 없는 누추한 시절로 허공을 붉게 물들이지.


오래도록 서 있었으며


자주 그랬으며


오늘은 어디에서 나의 죽음을 저당 잡힐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나 할까?


근거 없는 이유들로 살아내기엔 가슴이 너무 뭉클했고, 잠을 자면 죽은 것들이 가득했다. 마음 없이 떠돌던 모든 것들 내게로 와 잠들었다. 잠든 것들의 이마를 짚어주며, 내게 등을 보인 것들을 하나씩 지워냈다. 버려진 담뱃갑이 각을 세우고 누워 있는 구석 어디쯤, 뭐 그쯤에서 쓰러지면 그만이었다. 막막함이여.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절벽 가는 길 - 이승희



며칠치의 말들이 입속에서 저물고
또 저물어
검고도 흰 괴로움의 집을
짓고 부수는 동안
나는 잠들지 못했다
잠들거나 죽은 것들 사이에서
허공에 발 딛는 순간
붉은 꽃으로 피어
나 그만 항복하고 싶었다고
더는 누구도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하도록
수시로 뒷덜미에 칼을 들이대는 치욕이
나를 데리고 먼 길 가시라고
검은 입술을 부딪혀오는
들짐승 같은 바람의 털을 쓰다듬었다
난 아주 많이 외로웠다고
선량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평창동 고개 넘어
절벽 가는 길
가벼운 산책처럼
불 꺼진 버스가 절벽 끝으로 사라졌다
벽이 어딘가로 갈 수 있는 문이었으므로
절벽 또한 그러하다고 믿기 시작한 것은
다정하게 찾아드는 저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어떤가
일렁이는 불빛을 가슴에 심장처럼 달고
새처럼 바람처럼
한끝에서 한끝으로 옮겨가는 일
어찌 이리 쓸쓸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