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쪽박 위에서 또 내일을 - 서규정

마루안 2017. 12. 6. 19:18

 

 

쪽박 위에서 또 내일을 - 서규정


떠도는 말 있지, 눈을 아예 감아버린 자들이 삶의 끝을 보고
또 창공을 보았다고

부리로는 안 돼, 붓으로 지우듯 창살을 헤치고
새장에서 곧 벗어나오라
더 큰 감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 자유라는 책임은 결박이 된 지 이미 오래
절대자가 허락한 건, 만상을 그려도 좋다는 그것뿐인데
깃발부터 세우더니, 명예와 예의 미래까지 그리려다
국가라는 틀 속에 갇혀, 우리 모두는 새 됐다
금박 물린 새, 꽁지 빠진 새
그 처지에서도
눈멀고 귀가 먼 새가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건
천년을 흐르고도 멈추지 않는 강
강물을 단숨에 날아 건너지 않고 다박다박 걷는 제 발소리겠지
그런데도 물결이 너무 빨라
앞이 막히면 물이 범람하고 배가 산으로 가

깨진 쪽박, 초승달로 뒤집혀 뜨고 말걸

어서 벗어나오라, 말씀의 첫 장을 읽어야 뒷장을 치러내듯
들어나 봤어, 물감이 다 떨어진 화가가 다음 세상을 그린다는 말을


*시집, 다다, 산지니



 



서규정 - 맨입


빈 들에 축 쳐진 허수아비의 어깨까지가, 우리네 삶의
한 소절이라 하고, 꽃은 피고 새는 울고
빗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바위 굴러가던 소리가
두 소절이라면
눈보라는 바닥에 닿을 때까진 같은 방향이라도 몸 섞질 않듯이
하늘과 땅이 마주치는 소리
길과 길이 만나 장을 이루는 소리
우리가 우리를 부르던 소리, 어느 대목에서
노래는 탄생했을까, 음의 높낮이는 달라도 합창이라 하고
제 눈물이 제 발등을 다 태우더라도
나무처럼, 나무들은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뿌릴 흔드네
다만, 멀리 가는 가로수들은 열매 맺을 틈이 없어
해와 달을 열매처럼 따 던진다네
그대와 나
별똥별을 아작아작 씹으며 넘을 산, 빈 것들의 빈산이 가까이 있겠네

세 소절로 어서 가세, 헛헛한 가슴과 맨입이면 너무 충분한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한국해양문학상, 부산작가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