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목에 서 있는 바람 - 마종기
한 세월 멀리 겉돌다 돌아와 보니
너는 떠날 때 손 흔들던 그 바람이었구나
새벽 두 시도 대낮같이 밝은
쓸쓸한 북해와 노르웨이가 만나는 곳
오가는 사람도 없어 잠들어가는
작고 늙은 땅에 손금처럼 남아
기울어진 나그네 되어 서 있는 길목들
떠나버린 줄만 알았던 네가 일어나
가벼운 몸으로 손을 잡을 줄이야
바람은 흐느끼는 부활인가, 추억인가
떠돌며 힘들게 살아온 탓인지
아침이 되어서야 이슬에 젖는 바람의 잎
무모한 생애의 고장난 신호등이
나이도 잊은 채 목쉰 노래를 부른다
두고 온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바람이 늘 흐느낀다는 마을,
이 길목에 와서야 겨우 알겠다
*시집, 하늘의 맨살. 문학과지성
길 - 마종기
높고 화려했던 등대는 착각이었을까.
가고 싶은 항구는 찬비에 젖어서 지고
아직 믿기지 않지만
망망한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구나.
같이 늙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바닷바람은 속살같이 부드럽고
잔 물살들 서로 만나 인사 나눌 때
물안개에 덮인 집이 불을 낮추고
검푸른 바깥이 천천히 밝아왔다.
같이 저녁을 맞는 사람아,
들리냐.
우리들도 처음에는 모두 새로웠다.
그 놀라운 처음의 새로움을 기억하느냐,
끊어질 듯 가늘고 가쁜 숨소리 따라
피 흘리던 만조의 바다가 신선해졌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몰랐다.
저기 누군가 귀를 세우고 듣는다.
멀리까지 마중 나온 바다의 문 열리고
이승을 건너서, 집 없는 추위를 지나서
같은 길 걸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시집, 이슬의 집, 문학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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