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마루안 2017. 12. 5. 22:58



그리운 바다 성산포 4 -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 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 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 동천사

 







꽃처럼 살려고 - 이생진

 
꽃피기 어려운 계절에 쉽게 피는 동백꽃이
나보고 쉽게 살라 하네
내가 쉽게 사는 길은
쉽게 벌어서 쉽게 먹는 일
어찌하여 동백은 저런 절벽에 뿌리 박고도
쉽게 먹고 쉽게 웃는가
저 웃음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살려고 시를 썼는데 시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네
동백은 무슨 재미로 저런 절벽에서 웃고 사는가
시를 배우지 말고 동백을 배울 일인데'


이런 산조(散調)를 써놓고
이젠 죽음이나 쉬웠으면 한다

 

 



# 이생진 시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집이 바로 <그리운 바다 성산포>다. 이 시집이 워낙 유명한 탓에 시인의 다른 시집들은 이 시집에 묻혀버렸다고도 할 수 있겠다. 1978년에 나온 이 시집은 30년이 훨씬 넘은 세월 동안 여러 출판사를 거치면서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다. 베스트셀러보다 스테디셀러 되기가 더 힘든데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시 읽는 재미를 느끼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시집이기에 오래도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싶다. 고상한 평론가들은 이런 시를 비평하는 것을 망설이기도 하지만 그들한테는 쉬운 시 비평하기가 훨씬 어려운 것을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