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살아온 것처럼 한 문장을 쓰다 - 김태형

마루안 2017. 12. 5. 23:25



내가 살아온 것처럼 한 문장을 쓰다 - 김태형


 
외로웠구나 그렇게 한 마디 물어봐줬다면
물가에 앉아 있던 멧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어떤 떨리는 영혼을 올려놓고 갔을 것이다
첫 문장을 받았을 것이다
사나운 눈발 속으로 발자국도 없이
검은 늑대가 달리는 계절이었을 것이다
아프냐고 물어봐 줬다면
정녕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에게서 처음이었던 나를 완성했을 것이다
둥근 사방의 지평선을 건너갔을 것이다
단 한 마디가 필요했을 뿐
그것만으로도 나는
붉은 먼지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꿈결까지 뭔가 밤새 훔쳐왔어도
남은 것 하나 없이 마른 지푸라기뿐이어도
오로지 단 한 뼘뿐일지라도
일생의 길을 사위스레 멈칫거리다가
아무 것도 없는 허공 앞에서
제 몸을 사각사각 먹어치우는 눈먼 애벌레처럼
진흙 먹은 울음소리로 자기를 뚫고 가는 지렁이처럼



*시집, 코끼리 주파수, 창비

 

 






외로운 식당 - 김태형

 


초행이라 길 찾기 바쁜데도
길가 음식점 간판에 눈길이 머뭅니다
뭐 좀 새로운 게 없을까 싶어 찾아든 식당
빈자리 하나 잡기도 쉽지 않군요
그 틈새에 겨우 끼어
돌솥밥 한상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손님들 뒤쪽으로
기러기탕 백숙 육회
이 집 특별식 메뉴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습니다
식용으로 사육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기러기라니
멀건 하늘처럼 끓고 있는 탕 속에서
보글보글 날고 있는 기러기들
먼 길 떠나는 날개짓 소리는
사람들 시종 떠들어내는
온갖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습니다
저 늙어가는 사람들이 차라리
어디 가서 조용히 불륜이라도 저질렀으면 하고
측은해집니다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기러기 한 마리씩 뜯어먹는 대신
뭔가 그리워하는 얼굴로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로 앉아 있으면 안되나
아까 올려다본 흐린 하늘의 기러기떼가 아니었으면
내가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을 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