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운명의 중력 - 심보선

마루안 2017. 12. 1. 22:21



운명의 중력 - 심보선



내 눈동자는 태양을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제멋대로 하늘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시력이 있다

 
산책 내내 개는 쉬지 않고 짖는다
행인과 자동차를 향해
나무와 철탑을 향해
심지어는 구름과 그 너머의 창공을 향해
 

난리가 났구나
행인, 자동차, 나무, 철탑, 구름, 창공
하나하나 다 무서운 거겠지
이 세상에 무섭지 않은 게 뭐가 있겠니
 

너에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앞장선 개가 짖다 말고 뒤돌아본다
나는 웃고 개는 꼬리 흔든다
나와 개 사이의 중력이 따끔따금 눈동자를 찌를 때

 
나는 내 사랑을 떠올린다
내가 구원에 목말라 뒤돌아볼 때마다
키득거리며 머나먼 별의 흰 이빨을 보여주는

 
내 운명에 속하는 것과
내 운명에 속하지 않는 것
장난꾸러기 내 사랑은 나 몰래
둘 사이에 간지러운 중력을 숨겨놓는다

 
나에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나에게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홀로 여관에서 보내는 하룻밤 - 심보선



구름의 그림자가 화인(火印)처럼 찍힌 저녁 바다를 바라본다
나의 파탄이 누군가의 파탄으로 파도쳐 간다
어떻게 그댈 잊을 수 있겠는가
그토록 사소한 기억들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그대를


수 개의 등불을 끄고 한 권의 책을 덮으면
이 방의 어둠은 완성된다
행간에 머물던 내 시선이 곁눈질로 더듬었던 달빛이
방 안에 순식간에 스며든다


나는 나를 간절히 안아주고 싶기도 하고
이 세계를 두 발자국 만에 짓눌러버릴
거대한 눈사람을 저 모래사장에 우뚝 세우고 싶기도 하다
간혹 내 머릿속에선
옷을 입고 있는 사람과 벗고 있는 사람이
나를 버린 이들의 목록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간간이 동시에 떠오르는 다른 죽음들


회한과 자조로 가득한 겨울밤
과거를 향하여 이를 가는 짐승
파도를 가지 치며 수평선 위로
쑥쑥 자라 오르는 미래의 날카로운 환상
그때 뜨거운 물을 숨긴 주전자 같은 영혼은
내가 셋을 세기도 전에 태어나는 것이다
완벽한 혼란이 아니라 혼란스런 완벽으로부터


여관방 구석의 냉장고에선
실금 같은 빛이 새어나와 세계를 야금야금 톱질하기 시작한다
 

결국 극단을 택할 것인가, 나는





# 심보선 시인은 1970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했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