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돌아보면 혼자였다 - 이희중

마루안 2017. 12. 2. 17:10



돌아보면 혼자였다 - 이희중



피가 붉다는 풍문을 믿지 않았다
눈에 비친 세상은 흑백이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연인이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다녔고
연인은 그가 입은 옷의 색깔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은 어딘가 구겨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중 높은 곳을 함부로 걷다가 마구 굴러떨어져
낮은 곳에 쌓여 가만히 있었다 그러므로
지구가 둥근 것은 한낱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취해 길을 걸으면 언제나 벼랑에 닿았고
돌아보면 혼자였다 함께 술을 마시다가
돌연 흩어져 저마다 다른 골목을 헤매다녔다
색맹과 무지와 미로의 한철 지나고
색을 배우고 진리와 지혜를 배우고
이튿날 아침이면 다 잊어버리고 헛되이 색이 보인다고
지구는 둥글다고 거짓으로 떠들며
아는 길만 걸어다녔다 그사이 또 한철이 왔고 



*시집, 참 오래 쓴 가위, 문학동네








한번 등 돌리면 - 이희중



1
등 돌린 후 다시 돌아보지 마라
등을 보이고 걷다가 다시 뛰어오는 일은
삶의 모독, 삶은 장난이 아니며
영화가 아니니까
등 돌리기 전에 가능한 한 신중하라
그러나 지나치게 시간을 끌지는 마라
적어도 시간을 끄는 인상을 적들에게 주지 마라
어차피 후회의 여지 없는 완전한 선택은 없으니까
잊지 말 것은, 후회 때문에 엎어지지 않겠다는
필생의 각오
자신과 나누는 피 흐르는 약속
가능한 한 냉정하고 신속하게 결정하고
필요하면 즉각 등을 돌려라, 영원히


2
어두워지면 누구나 혼자로 돌아가듯
언젠가 우리의 어깨동무도 풀어야 하고
오늘의 다정한 말과 손길은 끝이 있다네
그러므로 참과 거짓을 알리는 일은 쓸모가 없지
우리는 얼마나 얇은 얼음 위에서 봄을 맞고 있는 것이냐


3
지금까지 손가락 숫자도 못 되는 여자들을 사랑했으나
아무도 오늘 내 전화번호부에 남아 있지 않다
또한 내 손가락 숫자 조금 넘는 사람들을 존경했으나
마음을 다해 고개 숙일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그들과 사이에 고운 말과 웃음은 허비되었다
이빨 숫자 정도 되는 사람들과 깊이 사귀었으나
돌아보면 벌레 먹지 않거나 덧씌우지 않은 관계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생존하는 사람 가운데 그리운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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