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놀이패에 걸리다 - 박지웅

마루안 2017. 11. 30. 19:56



꽃놀이패에 걸리다 - 박지웅



빛이 고맙게 걸려 있는 반지하 창가
나는 반상에 빠져 있네, 허를 놓아 실을 깨고
경쾌하게 뛰어나가 한판 겨루는 대마전(大馬戰)도 흥미롭네
장고를 거듭한 일격은 진작부터 읽혀버려
혼자 두는 바둑에도 승패는 있기 마련이네
묘수가 악수를 낳는 생각의 행마는
어처구니없이 달아나다 막다른 길에 서기도 하네
죽은 돌을 꺼내자니 벽도 함께 계가(計家)에 빠져 있어
오늘은 한 수 청하니 벽이 바싹 다가앉네
포석 지나 중반에 드니 반상넨 먼지가 이네
불 지피고 눈 목(目)자로 뛰어나가면 저편 행마는 가볍고
대마 쫓다 돌아보니 길 끊긴 돌들이 허탕에 빠져 있네
도마뱀 꼬리처럼 끊고 달아난 자리마다 저려오는 침묵을 놓고
그제야 고개 들어 크게 한번 살펴보니
서로 꿰어지지 않는 일로 배회하던 날이 보이네
길을 열지 못하고 마음 중앙에 무겁게 몰려 있던 얼굴과
중심을 잃은 팽이처럼 여러 개로 흩어지던 청춘과
반상 귀퉁이에 귀살이한 고단한 집이 보이네
가리지 못하고 뱉은 말 함부로 저질러 흑이 된 일
잘못 놓은 돌이 담처럼 결려오듯, 이 한판에 죄 들었네
어렵게 구한 내 삶의 약도
돌을 놓고 밖으로 나오니
몸 뒤에 세상 내려놓고 높게 돌아앉은 벽
빛, 한줄기 고맙게 다녀갔네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문학동네

 


 



 
 
너는 늙어서 죽었다 - 박지웅



신문지가 구른다 목련이 내려다보고 있다
바람이 세다 목련이 손가락을 뻗어 신문을 줍는다
사마귀처럼 돋은 꽃눈들 사이로 눈 내린다
저렇게 뒹굴다 간 사람 하나 있다
그를 품고 길 아래 구른 버스는
아무렇게나 구겨 싼 신문지처럼 그를 말았다
그날 첫눈은 기막히게 부드러운 죄를 지었다
목련이 신문을 내려놓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흉측한 꽃눈이 난 손가락 사이로 눈 내리고
음악이 사무실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더러 멈추고 더러 유리창에 가 붙었다가 떨어지는
구겨진 음악을 주워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오늘 유리창엔 도통 읽을거리가 없다
그래, 오늘은 단지 무료할 뿐이다
나는 믿지 않는다
오래오래 잘 살다가 너는 늙어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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