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참회록 - 허연

마루안 2017. 11. 30. 19:30



참회록 - 허연

 

영혼이 아프다고 그랬다. 산동네 공중전화로 더 이상 그리움 같은 걸 말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도 않겠다고 고장난 보안등 아래서 너는 처음으로 울었다. 내가 일당 이만오천 원짜리 일을 끝내고 달려가던 하숙촌 골목엔 이틀째 비가 내렸다.

 
나의 속성이 부럽다는 너의 편지를 받고, 석간을 뒤적이던 나는 악마였다. 십일월 보도블록 위를 흘러다니는 건 쓸쓸한 철야 기도였고, 부풀린 고향이었고, 벅찬 노래였을 뿐. 백목련 같았던 너는 없다. 나는 네게서 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떨리는 손에 분필을 들고 서 있을 너를 네가 살았다는 남쪽 어느 바닷가를 찾아가는 밤기차를 상상했다. 걸어서 강을 건너다 아이들이 몰려나오는 어린 잔디밭을 본다. 문득 너는 없다. 지나온 강 저쪽은 언제나 절망이었으므로.

 
잃어버렸다. 너의 어깨를 생머리를. 막차 시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빗줄기는 그친 다음에도 빗줄기였고, 너는 이제 울지 못한다. 내게서 살지 않는다. 새벽녘 돌아왔을 때 빈 방만 혼자서 울고 있었다. 온통 젖은 채 전부가 아닌 건 싫다고.



*시집, 불온한 검은 피, 세계사

 






 

내 사랑은 - 허연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24 공구 건설현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신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쇼 하지 마라 - 김왕노  (0) 2017.11.30
꽃놀이패에 걸리다 - 박지웅  (0) 2017.11.30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 주용일  (0) 2017.11.30
눈물이 완성되는 순간 - 김륭  (0) 2017.11.30
11월의 나무 - 황지우  (0) 2017.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