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젖은 노을 속으로 가는 시간 - 유하

마루안 2017. 11. 29. 21:35



젖은 노을 속으로 가는 시간 - 유하

 
 

비가 세상을 내려 앉히면
기억은 노을처럼 아프게 몸을 푼다
부리 노란 어린 새가 하늘의 아청빛 아픔을
먼저 알아 버리듯
어린 날 비 오는 움막이여,
왜 노을은 늘 비의 뿌리 위에서
저 혼자 젖는가
내 마음 한없이 낮아 비가 슬펐다
몸에 달라붙는 도깨비풀씨 무심코 떼어 내듯
그게 삶인 줄도 모르고
세월은 깊어서
지금은 다만 비가 데려간
가버린 날의 울음소리로 비 맞을 뿐
아늑한 눈길의 숲길, 말들의 염전
시간은 길을 잃고
나그네 아닌 나 어디 있는가
추억을 사랑하는 힘으로 세상을 쥐어짜
빗방울 하나 심장에 얹어 놓는 일이여
마음이 내려앉아 죽음 가까이 이를 때
비로소 시간의 노을은 풀어 논 아픔을 거두고
이 비의 뿌리 한 가닥
만질 수나 있을 것인가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세상의 모든 저녁 3 - 유하


 
또 하루가 어두워지려 한다
출구를 자기 뒷모습에 두고
유리창에 팅팅 몸을 부딪는 날파리처럼


헤비메탈을 부르다 뽕짝으로 창법을 바꾸는
그런 삶은 살지 않으리라


간성 가는 길, 청간정(淸問亭)에 앉아 저무는 동해를 본다
저 바다를 어찌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나무는 서 있고, 슬픈 육체여
지나온 사랑의 출렁거림 앞에서
난 아직도 망연자실하다


어스름 해변엔 청춘들이 모여 기타를 튕기고
제비 새끼같이 노랗게 벌린 입 속의 떨리는 목젖
다들 자기를 튕겨 저녁에 안기는 법을 알고 있을까


목숨의 등대인 듯 안간힘으로, 노래가 불을 켜들 때
구멍 난 세상의 캄캄한 울림통 속에서
내 가슴도 멍멍하게 따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