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람의 그늘 - 강연호

마루안 2017. 11. 29. 20:33



사람의 그늘 - 강연호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었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다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가늠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 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웠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멀리 외면했던
그늘의 길이를, 마침내는 깊이를
이제 와 곰곰 되짚는 일이다


그러나 눈 흐려진 지 오래
한 뼘 두 뼘 겨우 더듬을 뿐
사람의 그늘을 재어본 지 오래다



*시집, 기억의 못갖춘 마디, 문예중앙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 - 강연호



솥뚜껑 위의 삽결살이 지글거린다고 해서
생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찍 취한 사람들은 여전히 호기롭다
그들도 박박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남루나 불우를 그저 견디겠다는 듯
반쯤 남은 술잔은 건너편의
한가로운 젓가락질을 우두커니 바라 볼 뿐
이제 출렁거리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
참다 참다 그예 저질러 버린 생이 있다는 듯
창 밖으로 지그시 내리는 빗줄기
빨래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고
쌀알을 펼쳐 본들 점괘는 눅눅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마
이 밤이 지나가면 냉장고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야 할 새벽이 온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어쩌면 이 술잔은
여기 이 생에 건네질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삼겹살을 뒤집어 봐야 달라질 것 없고
희망은 늘 실날 같지만
오늘의 운세는 재기발랄 명쾌하다
62년생 범띠,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