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햇볕이 되었거나 노을이 되었거나 - 이기철

마루안 2017. 11. 29. 23:07



햇볕이 되었거나 노을이 되었거나 - 이기철


 
들판에 흩어져 피는 꽃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놓은 사람들은 어언 제 이름도 꽃이 되었거나 꽃술에 취해 잠든 나비가 되었거나

 

한 해 봄에서 가을까지 날아가도 제 그리움까지 닿지 못한 작은 새들에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제 이름도 어언 새가 되었거나 오리나무 가지에서 우는 새의 울음이 되었거나

 

도라지꽃을 피워놓고 혼자 잠든 산과 산에 그 키와 봉우리에 알맞는 이름을 붙여놓은 사람들은 벌써 산이 되었거나 산을 씻으며 흘러가는 강물이 되었거나

 

산 너머 또 산 너머 잠들어 있는 마을에 제가끔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벌써 제 이름도 햇볕이 되었거나 햇볕의 마지막 숨소리인 노을이 되었거나

 


*시집,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