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를 죽도록 사랑하기도 전에 - 박남원

마루안 2017. 11. 30. 18:22

 

 

너를 죽도록 사랑하기도 전에 - 박남원

 


너를 미처 사랑하기도 전에
마음속에는 비가 내렸고
너를 미처 사랑하기도 전에
세상은 이미 가득 젖었다.

너를 죽도록 사랑하기도 전에
또한 세상의 가로등은 하나둘 꺼지고
너를 죽도록 사랑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항구를 떠나 바다 끝으로 사라졌다.

어찌 눈물 흘릴 사이가 있었겠느냐.
어찌 세상 탓할 사이가 있었겠느냐.
봄이 오기 전에
봄꽃은 지고
개여울물 흐르기도 전에
봄조차 다 가버린 것을


*시집, 캄캄한 지상, 문학과경계사

 

 

 

 

 

 

병실에서 - 박남원

 

 

세상을 너무 깊이 사랑했던 것이 탈이었다.

그냥 잠시 문이나 열고 들어가

손이나 한번 잡고 말 것을

입고 있던 외투마저 벗어놓지는 말아야 했을 것을.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보다도 세상을 사랑하기까지는

갈대가 바람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아직은 험난하고

또한 세상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텅 빈 바람이 지나가는 일만큼 아직은 허무한 일,

너무 깊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이제와 너 그렇게 몸져누운 걸 보니

눈물이 나기 전에 먼저 찬바람이 부는구나.

밤 깊어 새벽이 다가올수록

사랑했던 사람은 문병을 오지 않고

새벽이 오기 전에 또 밤이 먼저 오고야 마는구나.

 

 

 

 

# 박남원 시인은 1960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숭실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막차를 기다리며>, <그래도 못다 한 내 사랑의 말은>, <캄캄한 지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