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 허수경

마루안 2017. 11. 28. 20:41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 허수경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 공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 갈 때
그 옆에 앉아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몰랐네
이 시간에 문득 해가 차가워지고 그의 발만 뜨거워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빛이 내리는 것을


수도원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
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
외로운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 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 - 허수경



마음에 든 소금
날 목마르게 한다
목마름이 짠 흰빛의 원천이다


그대는 먼 바다에서
죽음의 물결을 땅 쪽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모래사막에 얹혀진 소금 기둥처럼 녹는다


무너진 마음집 지반 사이로
옛 사원이 떠올라
내 마음속 양초 만드는 이들은 운다


아픈 이가 느릿느릿 죽을 입안으로 넣듯
그를 간호하는 이가 시름에 겨워
아무것도 목구멍으로 넣지 못하듯
낙타는 나에게로 들어온다


사막의 신기루로 꿈을 엮던 낙타
목이 말라 눈을 감을 때
사막에는 소금 열리고
낙타의 눈에도 소금이 맺힌다고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소금을 기다렸다
그때 알았다
해갈의 기척이 저 짠 흰빛에 있다


그 빛 날 데리고 갔다
목마름이 생애의 열쇠였다
텅 빈 고방을 지키는 열쇠였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년의 질병 - 마종기  (0) 2017.11.29
새치가 많은 가을 - 전동균  (0) 2017.11.28
바람의 작명가 - 김태형  (0) 2017.11.28
후회에 대해 적다 - 허연  (0) 2017.11.28
영화로운 나날 - 류근  (0) 2017.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