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새치가 많은 가을 - 전동균

마루안 2017. 11. 28. 20:58



새치가 많은 가을 - 전동균

 
 

아내 심부름으로
두부 한 모 사러 가는 저녁이었다
큰길을 놔두고
아파트 뒤 공터 지나
나무들 사이 소로를 고개 숙여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좀 천천히 쉬었다 가라고, 이 아름답고 좋은
풍경이 보이지 않냐고


이마와 가슴에는 적황의
단풍을 불붙이고
그 아래 허리께는
아직 푸른 이파리들을 매달고 섰는 한 나무 아래
처음 보는 가을이 앉아 있었다 머리에
새치가 많은


우리는 한참 동안
맨땅바닥에 쭈그려 앉아 말없이
담배를 나눠 피우며
참 곱기도 한 단풍잎이며,
먼 곳을 향해 깊어지는 찬 공기며,
이따금 공터를 가로지르는
겁 많은 소리 같은 것들을 바라보다가


나란히 어깨 맞대며 길 건너
양평집으로 갔다
뜨끈한 선짓국에 소주 한 잔 하러



*시집, 거룩한 허기, 랜덤하우스


 





 

어떤 쓸쓸한 생의 - 전동균



홍제역에서 깜박
잠들었다가 눈 뜨니 과천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몇 차례 문이 열리고 닫혔을 뿐인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다가 뚝, 끊어진다
사람들이 유령처럼 사라져간
어두운 지하도 저편에서
두두 두두두… 야생의 말들이 커브를 돌며
내달리는 소리 들리고
큰물 지듯
거친 물소리가 쏟아진다


도무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무덤과도 같은 과천역,
지하도 밖 세상은 아침일까 저녁일까
천국일까 폐허일까
나는 어떤 쓸쓸한 생의
부장품일까



 


# 전동균 시인은 1962년 경북 경주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등이 있다. 불교색을 풍기는 사유와 은유가 담긴 서정적인 시를 참 깔끔하게 쓰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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