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중년의 질병 - 마종기

마루안 2017. 11. 29. 15:00



중년의 질병 - 마종기


 
1. 꽃


해늦은 저녁, 병원 뜰에서
꽃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본다.
조용히 건네는 말의 품위가
깨끗하고 거침이 없다.
나도 말을 먼저 했어야 했다.
꽃 하나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 사람
꽃에게 말하는 이의 길고 추운 그림자,
저녁의 꽃은 춥고 아름답다.


2. 새


비 오는 날에는, 알겠지만
대부분의 새들은 그냥 비를 맞는다.
하루 종일 비 오면 하루 종일 맞고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에는
대부분의 새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새들은 눈을 감는다.
말을 하지 않는 당신의 눈의 그늘,
그 사이로 내리는 어둡고 섭섭한 비,
나도 당신처럼 젖은 적이 있었다.
다시 돌아서고 돌아서고 했지만
표정 죽인 돌의 장님이 된 적이 있었다.


3. 詩


하루를 더 살면 그만큼 때가 묻고
한 해를 더 살면 그만큼 때가 더 는다.
매일처럼 목욕하고 때를 벗겨내는
친구의 피부는 새롭고 밝다.
내 詩를 보면 왜
때만 많이 만져질까.
때를 씻고 지우다 보면
지운 자국이 미끄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때가 많은 詩,
때묻은 것이 나 같구나, 하면서
친구처럼 피나도록 씻지 못한다.



*시집,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

 







늙은 비의 노래 - 마종기

 


나이 들면 사는 게 쉬워지는 줄 알았는데
찬비 내리는 낮은 하늘이 나를 적시고
한기에 떠는 나뭇잎 되어 나를 흔드네.


여기가 희미한 지평의 어디쯤일까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사방의 시야를 막고
헐벗고 젖은 속세에 말 두 마리 서서
열리지 않는 입 맞춘 채 함께 잠들려 하네.


눈치 빠른 새들은 몇 시쯤 기절에서 깨어나
시간이 지나가버린 곳으로 날아갈 것인가
내일도 모레도 없고 늙은 비의 어깨만 보이네.


세월이 화살 되어 지나갈 때 물었어야지
빗속에 혼자 남은 내 절망이 힘들어 할 때
두꺼운 밤은 내 풋잠을 진정시켜 주었고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편안해졌다.


나중에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안개가 된 늙은 비가 어깨 두드려 주었지만
아, 오늘 다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빗속에 섞여 내리는 당신의 지극한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