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작명가 - 김태형
어느 작명가가 지은 것은 내 이름만은 아니다
지나가는 이를 불러다 얼마를 주고
이름을 지었다는데
척 이름자를 적어놓고는
장차 시인이 될 운명이라고 했다든가 그이는
그렇게 말했다 한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운명이라는 게 다가온 것일까
그게 아니지 싶기도 해서 딴청을 부려보는데
생각해보면 아마도 떠돌이 작명가는
이름 한번 지었다 싶어
그리 말했을 것이다
그 운명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시를 쓰다 바람에
구름 한 점 걸어놓지 못하고 떠돌던
자신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것
부르고 다시 지워내는 그것은 구름과 바람의 문장이다
그렇게 그가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부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딱히 틀린 운명을 살지는 않았던 모양일까
나에겐 그이의 운명도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김태형 시집, 코끼리 주파수, 창비
디아스포라 - 김태형
시베리아 유형지의 죄수들에게는
단 한순간도 혼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손톱에 파란 얼음 달이 뜨는
더러운 추위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혼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정 혼자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무슨 꿈을 꿀지 모른다
차가운 마룻바닥의 어둠 속에서
어떤 괴물이 태어날지 모른다
죄수 안에 또다른 죄수가
이제 막 탄생하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외로운 것은 혼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토록 괴로운 이유는
당신을 끝내 그리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김태형 시인은 1970년 서울 출생으로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을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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