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영화로운 나날 - 류근

마루안 2017. 11. 27. 22:04



영화로운 나날 - 류근



가끔은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갈 곳 없는 아침이었다

혼자서 객석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더러는 중년의 남녀가 코를 골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 순댓국집 같은 데 앉아 낮술 마시는 일은

스스로를 시무룩하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날은 길었다 다행히 밤이 와 주기도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든 내가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밖으로 오는 소리에만 귀를 귀울이는 시간을 공연했다

심야 영화관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저녁 시간이 느리게 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식민지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엔 우리가 모르는 암표도 많을 것이다

입을 헹굴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도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지나갔다는 것 때문에 퍽 안심이 되었다

심야 영화관에서 나오면 문을 닫은 꽃집 앞에서

그날 팔리지 않은 꽃들을 확인했다 나 또한

팔리지 않으나 너무 많이 상영돼 버린 영화였다



*류근 시집,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








나에게 주는 시 - 류근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 그래, 내게도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지. 그때는 몰랐으나 돌아보면 아득해지는 그리움,, 이렇게 마음에 닿는 시를 읽을 때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영화로운 날이 있었던가? 한꺼번에 잊기엔 조금 아쉬운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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