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후회에 대해 적다 - 허연

마루안 2017. 11. 28. 19:27

 

 

후회에 대해 적다 - 허연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를 받고, 남은 술을 벌컥이다가 덜 자란 개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추적추적한 거리를 걸었다. 위성도시 5일장은 비릿했다.

 

떠올려 보면 세월은 더디게 갔다. 지금은 사라진 하숙촌에서 나비 떼 같은 사랑을 했었고, 누군가의 얼굴이 자동차 앞 유리창에 가득할 때도 그게 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아득해지지 않았으니 세월은 너무 더디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지
 

아득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스스로 가해자가 되어 문자로 답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나를 울린 건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었을 뿐,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은하열차처럼 환한 전철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바짓단이 다 젖도록 거리에 서 있었다.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천국은 없다 - 허연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사랑이 한때의 재능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인간에게 아주 빨리 온다. 신념은 식고 탑은 무너진다. 무너지는 건 언제나 상상력을 넘어선다. 먼지 휘날리는 종말의 날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다행히 지칠 시간은 없다.

 

탑의 기억이 사라질 즈음
세상엔 새로운 날이 올 것이다.
지긋지긋한 어떤 날이.

 

 

 


#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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