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 - 이용호 시집

마루안 2017. 11. 25. 21:21

 

 

 

우연히 손에 잡힌 시집이 깊은 울림을 줬다. 근래에 이렇게 집중해서 읽은 시집이 있었던가 싶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이용호 시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다. 어쩌면 무명시인이라 해도 되겠다. 시인의 시도 이 시집에서 처음 읽었다.

약력을 보면 <유배된 자는 말이 많다>라는 시집을 냈다고 한다. 어차피 한국 문학계에서 시인은 무지 많다. 그러니 시집을 냈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묻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시집을 만난 건 행운이다. 발견했다고 해야 맞겠다.

보통 한 권의 시집에 60여 편의 시가 실린다. 그러나 그런 시집을 전부 읽고도 이 블로그에 올리기 위한 두 편을 고르기가 힘든 시집이 부지기수다. 무조건 아무 시나 올리지 않고 까따롭게 고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움직인 시가 없으니 어쩔 것인가.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에는 마음 가는 시가 너무 많았다. 가능하면 한 시인을 편식하지 않으려는 생각에 추려내어도 남은 시가 여러 편이다. 시집 읽고 후기 잘 안쓰는 내가 이곳에 감상을 적는 것도 그런 이유다.

나는 문단이나 출판계에 아무 인연이 없는 평범한 독자다. 내 주변에도 책 읽는 사람보다 삼겹살에 소주 마시고 노래방 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니 책을 추천해주는 사람보다 맛집 소개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서점을 갈 때마다 시집 코너는 꼭 들른다. 그곳에서 우연히 걸려든 시집이 가끔 있는데 이 시집이 그렇다. 좋은 시를 만났을 때의 기분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설레는 마음으로 같은 시를 반복해서 읽는다. 울림이 있는 시는 자연히 두번 세번 읽게 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하나 올린다. 시인의 성품이 오롯이 담긴 시다. 여러 번 읽었으나 여전히 감동적이다.



마상격문 - 이용호
-고경명의 일기 1


아버지와 형들을 기어코 따라가겠다고 막내가 울부짖었다, 이제 열다섯, 아직 피지 못한 꽃이었다. 너 하나는 남아야 한다 큰애와 작은애를 불러 옷섶에다가 제 이름을 자수로 새기게 했다 시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땐 이걸로 아버지와 형들을 찾거라, 막내가 울기 시작했다 환갑이 코앞이었지만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칼집에서 공맹孔孟의 도리가 울었다 태인까지 나갔던 척후병이 시퍼런 몸으로 돌아왔다 제집으로 돌아가는 막내의 뒷모습이 족보처럼 무거웠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주지 못한 사랑이 새벽안개에 싸여 촘촘히 퍼져 나갔다.

담양의 대를 꺾어 축창을 만들었다 아슬하게도 의義는 아직까지 두텁고 무거웠다 주먹밥 하나로 허기를 채울 때 성상이 의주로 파천했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곳에 그와 내가 서 있었다 붓을 들면 어디서 밤새워 우는 별들의 곡소리가 봉두난발 벌판을 달려나갔다 임진년에는 하늘에서도 핏비가 내렸다 누룩내를 맡은 지가 아득했다 고독한 보리밭에 술 익던 마을이 환영처럼 번져나갔다.

봉산 제월봉에 낮달이 걸려 있었다 식영정 찬이슬에도 술잔을 기울이던 벗들의 온기가 그리웠다 새벽잠을 찾아온 그들의 모습에 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상처는 의義보다 아팠으나 따스했던 술잔 속에는 걸어가야 할 길이 있었다 이것을 지켜야 한다 스멀거리는 안개 속에 식영정이 몸을 떨며 울기 시작했다 무례하게도 기억 속에 묻히던 세월이 고개를 꼿꼿하게 든 채 일어났다, 지키지 못한 곳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위급 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열 손가락 끝에 걸리는 함성 소리가 담양의 벌판을 둘러쌌다 말 잔등에 앉아 바라본 식영정에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 모이고 모여 바다를 이루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결사하여 죽창을 들어 올리자 하얀 두건을 두른 의병의 손에서 횃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자. 가자.


*고경명 '마상격문' <제봉선생집> 권7 징기록에서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