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해 여름 - 허장무

마루안 2017. 11. 18. 21:36



그 해 여름 - 허장무


 
내게, 꼭 한 번 보고 싶은 여자가 있다면
고등학교 다닐 무렵, 여름방학 때 고향집에서 만난,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
우리 집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새경을 살던 내외의 딸
아미를 숙이고 지나가면 감자꽃 향기가 풍기던
보라색 가지 냄새도 나던
마당을 가로질러 헛청이나 부엌을 드나들던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있던, 내 또래의 계집애
나를 보면 멀리서도 금방 뺨이 붉어져
까만 머릿결 사이로 얼굴을 감추던
공부를 안 해서 더욱 착하고 고와 보였던
긴 여름의 황혼 속에서
옥수수밭 사이로 반짝이던 모습 그대로
석류나무 아래 서있을 때면 정말 익어가는 석류 같던
무슨 잘못으로 어미에게 등짝을 맞으며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치마말기로 눈물을 훔치던
아비가 바쁠 땐 논에 물꼬를 보러 다니던
장대비를 맞고 흠씬 젖은 옷을 손으로 쥐어짜던
빗물 떨어지는 처마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마당에 모깃불을 놓고 시냇가로 등목하러 가던
밤이면 석유 등잔 너머 긴 갈래머리 그림자가
이슥토록 띠살문 사이로 어른거리던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이다 말고 나를 보자
기겁을 하고 뒤란으로 돌아가던
수심 깊은 눈길로 이내 그 긴 속눈썹을 내리깔던,
설익은 낮달이었을까
풋과일처럼 싱싱하던, 물빛처럼 출렁이던
지금도 문득문득 기억 속에 물결치는
잠시 머물다 흔적도 없이 떠나버린
영영 볼 수 없는 허전함으로 가슴을 쓸게 하던
꼭 한 번 보고 싶은....



*시집, 밀물 든 자리, 문학과경계

 







검버섯 - 허장무



지난 날 마음에 맞불 놓았던 자리
상처에 딱지로 남아
손등에 솟아나는
국화꽃 무늬 같은,
달빛도 슬픈 길모퉁이에서
무수히 헤어지며 떨구고 간
바람의 풍경 소리 같은,
떠난 지 오랜
당신의 이름 위에 찍힌
눈 시린 눈물자국 같은.

 
 

 


# 허장무 시인은 1947년 충북 음성 출생으로 청주교대를 졸업했고 1983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람 연습>, <밀물 든 자리>가 있다. 오랜 기간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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