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을, 붙들렸다 가는 노을 - 유종인

마루안 2017. 11. 17. 20:35



노을, 붙들렸다 가는 노을 - 유종인

 

하루 취하기에는 초저녁부터 그렇더군
벌써 실패한 사랑이 찾아오더군
이쯤 세상의 문이란 문들은 모두
두근거리는 불안의 심장이더군!


흔들리지 않고서야 길이 가지를 치겠나
가지를 친 길목에
미친 듯 몸부림치는 버드나무 한 그루에
바람은 추운 굿춤을 추다 가더군


오늘 마음 주지 않은 당신은
어제 나를 버렸겠지만
내일 황토 봉분으로 우두커니 노을 앞에
남기도 남겠지만


가다가 뒤돌아보는 눈길이
너무 눈부셔
캄캄하게 저녁의 구멍만 커지는
당신도 하루마다 노을에 목덜미를 잡히는
말하는 비석, 하루마다
비문(碑文)이 달라지는 가슴 나와 같다더군



*유종인 시집, 교우록, 문학과지성






 


어떤 문신 - 유종인

 


비가 내렸다
지하철 입구 한구석에 처마도 없이
비를 긋는 사내가 있다
옆구리로 모로 누운 채
온몸에 비를 심는 사내가 있다
저 후줄근해진 몸에 비만 심었으랴


능글맞은 창녀처럼 치근대며 오는
비의 손목을 끌고
변변한 묵정밭 한 뙈기 없는 시골 내려가면
그대로 반가운 못비가 돼 내릴 봄비를
사내는 여전히 불모의 몸뚱이에 심어버리고 있다


내리는 비가
누워있는 사내보다 더 건장하게 내리는 오후,
사내의 팔뚝에 심어진 문신 한 토막엔
시퍼런 격문처럼 '사람'이란 글자가
거무죽죽한 살갗에 세들어 있다


몸이, 저 버려진 몸이 제 몸이 사람임을 알 리 있으랴
누운 정신의 아득함이 제 몸의 슬픔을 말릴 줄 있으랴


살갗 속에 일렁이는 푸른 사람이여
언젠간 썩어질 몸이 마지막 호패처럼 차고 있는
사람이라는 두 글자, 그 시퍼런 미망이여


*시집, 수수밭 전별기, 실천문학


 




# 유종인 시인은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시립인천전문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했고 1996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 수수밭 전별기>, <사랑이라는 재촉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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