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왼발 - 강영환

마루안 2017. 11. 18. 21:16



나의 왼발 - 강영환

 
 

오른발이 먼저 가고 그 뒤를 따른다
앞서 가고 싶은 마음이야 없을까만
그런 속내도 드러내지 못하는 왼발은
외출을 위해 신발을 신거나
온탕에 들어설 때도 습관처럼 밀렸다
험하거나 진 데가 아니더라도 왼발을 먼저 놓는 때면

어김없이 넘어지거나 부딪혀 몸에도 상처가 났다
왼발은 천덕꾸러기로 마구 굴러서
무좀도 생기고 새끼발톱도 찌그러진 채다

내세울 일 하나 없는 나의 왼발은
주눅 들어 3미리쯤 작아졌다
서 있을 땐 모르지만 걸을 때는 기울어져
세상도 3미리쯤 왼편으로 기울어졌다 펴졌다
대접 받지 못하는 나의 좌익처럼
오른발의 꽁무니에 붙어 밖에 나서도 얼굴이 없다
죽어 다시 태어날 때는 그래도
냄새나는 오른발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집, 집을 버리다, 신생


 






아직도 목쉰 노래가 남는다 - 강영환



비탈진 산복도로 늦은 귀가 길

파란 대문은 닫히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숨 가쁜 언덕길 옆으로 기우는 별빛이

벌써 숨어간 뒤에 아직도 밤이다

빼앗긴 풍경 속에서 눈은 멀고

점자(點字)의 감촉은 손끝에서 지워졌다

누구도 흰 지팡이를 피해가지 않는다

건널목의 턱도 낮아지지 않는다


등 뒤에나 보이지 않는 다락 위에서

숲을 넘어뜨리고 물을 죽인다

편안한 잠을 권하는 방송의 노래가

누구에게나 말초신경 가지를 희롱한다

일어서서 걷지 못해도

걸어가 온실 유리를 깨뜨릴 수 없어도

푸른 하늘은 지나간 세월이다


지금은 일어나 걸어야 한다

근육으로 살아남아 숨쉬기 위해

이두박근을 솟구쳐 목이 쉰 노래를 부른다

그대 곁에 끝까지 남아

손과 발로 살아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일어나야 한다





# 강영환 시인은 1951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칼 잠>, <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 <쓸쓸한 책상>, <황인종의 시내버스>, <길 안의 사랑>, <푸른 짝사랑에 들다>, <집을 버리다>, <눈물>, <산복 도로>, <울 밖 낮은 기침소리> 등이 있다. 이주홍문학상을 수상했고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 강영환 시인은 환갑이 넘은 중견시인답게 많은 시집을 냈다. 시인이 세상에 내놓은 시집이 스무 권은 족히 될 것 같은데 시인의 고향에 자리하고 있는 지리산에 관한 여러권의 시집을 포함해서 몇 권의 시조집도 있다. 이렇게 많은 시집을 낸 시인임에도 생각보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다. 시인의 유명세와는 별개로 읽고 싶은 마음이 단박에 들 정도로 시집 제목을 하나같이 잘 지었다. 시 하나하나의 제목 또한 서정성이 진하게 느껴져서 차용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제목이 참 많다. 좋은 시란 제목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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