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간 자의 그림자 - 김충규

마루안 2017. 11. 17. 20:03



간 자의 그림자 - 김충규

 
 

가진 것 없으니 어둠이 근친이다 술이 핏줄이다 그렇게 살다간 큰형님은,
오십 중반도 못 넘기고 저승 갔다
간 자가 서럽나 간 자를 보내고 남은 자가 서럽나


모르겠다


태양이 몰핀같이,
낮 동안 통증을 잊고 지내라 다그치고
나는 아우로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둠이 어둠과 섞여 더 질척해지는 동안
또 다른 누군가도 가진 것 없어 먼저 갈지도 모른다


궁금하지 않다


다만, 누가 더 서럽나 간 자? 남은 자?
숨결에 불순물이 섞여서 수시로 기침이 터져 나오는 밤,
내 창밖에 서성거리는 저것이 간 자의 그림자라는 생각,
그림자 홀로 간 자가 죽기 전 걸어 다녔던 길들을 서성거리고 있다는 생각,

 
 
때론 눈알에 핏줄이 몰릴 때가 있는데
너무나도 선명하게 간 자와 함께 했던 어느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때,
서럽다고도 안 서럽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간 자를 내가 더 빨리 가라고 등 떠민 게 아닌데
내 등이 후끈 차가워지는 순간이다
누가 내 등을 떠미는 듯,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땡끌땡글한 저승의 어둠 속으로,

 
 
붉은 눈알로 창밖을 바라보면 거기 간 자가 남기고 간 그림자,
아닌 듯 땅바닥에 드러눕는 것을 보기도 한다
내 그림자를 내 주고 그 그림자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그러면 왠지 내가 이승을 아무 미련 없이 견뎌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러다
문득,
혹시 내가
간 자가 남기고 간 그림자가 아닌가,
멍해지기도 하는데



*시집, 아무 망설임 없이, 문학의전당

 

 






가는 것이다 - 김충규



어둠에 발목이 젖는 줄도 모르고 당신은 먼 곳을 본다
저문 숲 쪽으로 시선이 출렁거리는 걸 보니 그 숲에
당신이 몰래 풀어놓은 새가 그리운가 보다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발목을 다친 새이므로
세상의 어떤 숲으로도 날아들지 못하는 새이므로
혀로 쓰디쓴 풍경이나 핥을 뿐
낙오가 우리의 풍요로움을 주저하게 만들었지만
당신도 나도 불행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
어둠에 잠겨 각자의 몸속에 있는 어둠을 다 게워내면서
당신은 당신의 나는 나의
내일을 그려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태양의 순결을 믿고 있으므로
새를 위하여 우리 곁에도 나무를 심어 숲을 키울 것이므로
그래, 가는 것이다 우리의 피는
아직 어둡지 않다



*유고 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문학동네


 



# 뒤늦게 시인의 시를 읽다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시인의 시가 참 어둡게 다가옴을 느낀다. 타고난 정서가 다소 어두운 편에 속하다 보니 이런 시가 더욱 가슴에 박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오십 중반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형에 대한 그리움을 아프게 노래했지만 정작 자신은 40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간 사람이나 남은 사람이나 서럽기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남은 자가 더 서러운 법이다. 자신이 일찍 떠날 거라고 예감했을까. 놀랍게도 시인은 생전에 많은 시에서 죽음을 노래했고 그래서 일찍 세상을 떠난 시인이 더욱 안타깝다. 때론 어두운 시가 삶의 고행과 아픔을 잊게도 하는 법, 시집에 남긴 시인의 말을 옮기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死後(사후)엔 극지를 떠도는 샤먼이 되고 싶은데,,,


내가 詩라고 쓴 것은,
사후의 呪文(축문)이 되기 위한
중얼거림에 불과할 것.

 

*시집, 아무 망설임 없이 -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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