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독한 연애가 생각나는 밤 - 권현형

마루안 2017. 11. 16. 23:02



독한 연애가 생각나는 밤 - 권현형



함부로 슬픔을 내보이지 않는 자의
혀가 저리 흰가
독한 연애의 끝이
저리 무심한가
어둠 속 흰 박꽃 같은 눈송이는
어떤 내성(內省)을 닮아 있다
백두산 어느 골에 산다는
우는 토끼의 눈망울이 생각나는 밤


우는 토끼라는 서글픈 학명처럼
눈 내리 퍼붓는 깊은 산골짝서
이승의 한 철을 홀로 견뎌야 하는
순한 짐승의 독한 발자국을
따라가 보느라
잠이 오지 않는 밤


진짜 연애는 칼날을 삼킨 듯 아파도
혀끝으로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던가
선배의 연애론이 생각나는
함박눈 내리는 밤
명치 끝이 저려 와
불도 켜지 않고
뜬 눈으로 가만 앉아 있다



*시집, 밥이나 먹자 꽃아, 천년의시작








어느 개 같은 날의 오후 - 권현형

 

내가 반쯤 젖고
당신도 절반쯤 젖었으니
우린 피차
마찬가지지요
시시한 인생들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연애나 한 번 해볼까요
저 비 오는 질척한 거리로 나가
신발이 다 해지도록
마음마저 해져 차라리 나풀나풀
화냥기 많은 계집의 치맛자락처럼
가벼워질 때까지 수캐마냥 암캐마냥


나돌아다녀볼까요
사랑하노라고
당신 없이는 죽어도 못살겠노라고
혀로 입술로 거짓 맹서라도 나누며
어디 살아 견뎌볼까요


비 오는 날엔 부디 당신의 눈빛을 가두시길
젖어 희번득거리는 그 외로움을
헉! 숨막히도록 빨아들일 누군가를 조심하시길
발정한
또 한 외로움을


*시집, 중독성 슬픔, 시와시학사





# 권현형 시인은 1966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나 강릉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이 있다.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을 수상한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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