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 권대웅

마루안 2017. 11. 13. 20:37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 권대웅

 


떨어지는 빗방울에게도 기억이 있다
당신을 적셨던 사랑
아프지만 아름답게 생포했던 눈물들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 건널목에서
비 맞고 서 있던 청춘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마다
기우뚱 하늘 한구석이 무너지고
그 길로 젖은 불빛들이 부푼다
흐린 주점에서 찢었던 편지들이
창문에 타자기의 활자처럼 찍히는
빗방울의 사연을 듣다보면
모든 사랑의 영혼은 얼룩져 있다
비가 그치고
가슴이 젖었던 것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몸으로 젖었던 것들만이 잊힐 뿐이다
밤거리를 맨몸으로 서성거리는 빗방울들
사랑이 떠나간 정거장과 쇼윈도와 창문과
나무들의 어깨 위로
구름과 놀던 기억들이 떨어진다
국화 허리 같은 당신이 떨어진다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시집, 나는 누가 살다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이유도 없이 못 견디게 그리운 저녁 - 권대웅



계절에도 늑골이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햇빛이 자리를 바꿀 때마다
가려졌던 젖은 기억들이 드러나
부끄러울 때가 있다
따가울 때가 있다
모두가 그것을 감추고 살지만
봄이 목이 메도록 짙은 철쭉을 데려오고
여름이 훌쩍 해바라기를 데려가듯이
떠나간 것들이 다시 오고
다시 온 그 무엇 때문에
못 견디게 외로을 때가 있다
때로 어떤 저녁
지나가는 바람에 묻어 있는 냄새에
오래 비어 있는 적산가옥 같은 것
저녁의 뒤란 같은 것
마당에 가뭇가뭇 꺼져가는 짚불 같은 것
그곳에서 살았던, 사랑했던 기억이
잠깐 떠오르려다가
후다닥 먼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떠나고 다시 오며 바뀌어가는 것들
그렇게 우리는 어떤 거대한 바퀴에 실려갔다가
모든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서로가 그리운 계절에 다시 온 것 아닐까
가끔씩 그 사이가 보이고
목에 걸린 작대기 같은 그 기억 때문에
못 견디게 외로운 저녁





*시인의 말


14년 만에 내는 시집인데 140년처럼 먼 것 같다.
140년 전에 나는 어느 여름을 살았고
140년 후에는 또 어느 시냇물이나 구름,
혹은 바람 같은 것으로 흐르고 있을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여름의 눈사람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들.


가을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소 한 마리가
달을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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