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배경에 대하여 - 황규관

마루안 2017. 11. 13. 20:21



배경에 대하여 - 황규관



한계령 고갯마루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
내 배경은 흐릿한 원거리임을 불현듯 깨닫는다
돌아보면 소용돌이 같은 낭떠러지,
그게 애인을 떠나보내고
세상에 안착하는 걸 방해하는 것
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다
빛나는 내일이 가지고 싶던 때도
꿈틀대는 건 어두운 배경이었을 뿐
웃었으나 울었고
사랑했으나 미워했다
모든 게 다시 배경이 되었다
단지 적막만 취하고
망각의 강 앞에 혼자 서고 싶다
이제 믿는 건 내 배경밖에 없으므로



*시집, 패배는 나의 힘, 창작과비평


 






아침 똥 - 황규관



아침에 싸는 똥은
어젯밤의 내 내력이다
그러니까 몸뚱이의 무늬다
무얼 먹었는지
무슨 맘을 가졌는지
싸웠는지 하하 즐거웠는지
남김없이 보여준다
사랑과 폐허, 그리고 원망과 주저 등을
몸은 끙, 한 마디로 말한다
쌓아두지 않는 건 몸의 운명인데
내가 지금껏 한 고백들, 선언들, 다짐들은
모두 무언가에 짓눌려 뱉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 업이 되어버렸다
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똥은
아무 형식도 없이 쏟아진다
어젯밤에 술 취해 고성을 질렀던
핏대도 아프게 쏟아진다
귀 기울여보면
대체 무엇이 이보다 더 냄새나는 말인가
이 세상에
햇빛이 가 닿은 우주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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