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또 다른 생각 - 이수익

마루안 2017. 11. 15. 21:54



또 다른 생각 - 이수익

 


뭉개지는 것도 방법이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내가 각을 지움으로써 너를 편안하게
해줄 수도 있다. 선창에서
기름때 절은 배들끼리 서로 부딪치듯이
부딪쳐서 조금 상하고 더러 얼룩도 생기듯이
그렇게, 내 침이 묻은 술잔을 네가 받아 마시듯이

네 숟가락 휘젓던 된장국물을 내가 마시듯이

그렇게, 서로 친밀해지는 것이다.
자, 자,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
취한 기분에 붙들려 버럭 소리도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시간도 참으로 필요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도 소중하다.
시퍼렇게 가슴에 날을 세우고
찌를 듯이 정신에 각을 일으켜
스스로 타인 절대출입금지구역을 만들어 내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배신하고 모반하는 일은
네게는 매우 소중한 덕목이다.
안락한 일상의 유혹을 침 뱉고 저주하라, 그대
불행의 작두 위를 걸어야 할  시인이여.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천년의시작


 






틈 - 이수익



문틀 사이로
처음엔 너무나 아귀가 잘 맞아서
좋은 궁합이었던 문틀 사이로
어느새
틈이 벌어졌다. 화해가 먹혀들지 않는다.


둘 사이를 힘껏 끌어다 붙여도
절대, 다시는,
재결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부리는 심술
별거(別居)의 틈새가 사납다.


영원히 함께! 약속으로
입맞춤할 수 있는 일 아무것도 없다.
눈부시게 천년 누대(累代)를 떠받쳐온 종탑도
수백만 년 견뎌온 저 산 암벽 덩어리도
결국은 균열이 가고, 틈이 벌어지는 것이니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날 피로써 사무쳤던 붉은 인연이여!
맞이하자, 기꺼이,
저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시간이 밀어내고 있는
우리 사이 슬픈 틈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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