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의 육체 - 김륭

마루안 2017. 11. 9. 21:10



바람의 육체 - 김륭



내 몸을 쳐들어왔다 죽은 시간이 머리카락으로 자라 슬그머니 들어올린 무덤, 달은 그렇게 목을 졸라맬 수 없는 그림자 몇 장 피웠다 지우고 훌쩍 키만 자란 바람이 울어 자꾸 울어 손발만 그려주면 사람이다 드르륵 어제를 성큼 들어서는 당신


털석, 주저앉아 바닥 칠 수 없는 문밖의 자귀나무를 갈비뼈 삼아 본색을 드러내는 당신은 라면 박스 안 새끼 고양이 같아서 우리 어머니 죽어서도 고삐를 놓지 않을 송아지 같아서 운다 자꾸 울어서 죽음마저 깨운다


울어라 울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살아서 울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울음의 솔기가 풀릴 때마다 나는 슬그머니 지붕 위로 올라가 눈물 한 장 더 갈아 끼우고 돋보기 쓴 어머니 바늘에 실 꿴다


문 쪼매 열어보거라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문학동네


 






물고기와의 뜨거운 하룻밤 - 김륭

 
 

나는 아무래도 눈물 한 토막을 전생에 두고 온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펄쩍, 어항 속을 뛰쳐나와 바닥을 팔딱거리는 금붕어에게 눈이 멀 까닭이 없다 화장을 지우는 당신 입안 깊숙이 나는 아직 거짓말이다 스르륵 바지부터 벗어던지는 혓바닥이 너무 뜨겁다


달의 속곳이라도 훔쳐 입은 듯 달달해진 그림자 밑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바람이 발라낸 가시나무의 살이 건져지는 밤, 당신의 무릎 사이 깨진 어항 하나로 떠오른 나는 아무래도 눈물에 길을 가로막힌 것 같다


내일쯤 눈꺼풀을 잘라내기로 했다 푸드덕 머리를 열고 날아오르는 새들보다 먼저 태양을 필사한 금붕어 배를 갈라야겠다 한 번의 생으론 탕진할 수 없는 눈물의 체온을 식혀야겠다 고백컨대 나는 전생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게 눈물이란 까마득히 밑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솟구치다 딱, 두 눈을 마주친 물고기의 전생이다 섹스를 할 때마다 둥둥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 죽은 연어가 떠오른다 내 몸은 아무래도 영혼을 헛디뎠다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 당신의 거짓말로 살기엔 가시가 너무 많다

 




# 김륭 시인의 본명은 김영건,, 김영건 하면 성형외과 의사 이름처럼 들리다가 김륭 하니까 조금더 시인처럼 들린다. 그것도 코스모스, 가을이 오면, 꽃이 질 때 등등 많은 시인들이 제목을 붙여 욹어 먹은 이런 평범한 제목을 달아 시를 쓸 것 같지 않은 필명이다. 그의 독특한 필명답게 김륭의 시는 문체도 호흡도 개성이 있다.


의 시를 읽다 보면 언뜻 내가 좋아하는 허연 시인의 문체가 느껴질 때도 있는데 시인에게는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시가 좋다는 뜻으로 한 얘기다. 모든 그리움은 바람이 되어 온다. 사람이 갑자기 연애병이 생겨 바람이 나는 것도 사무친 그리움을 극복하지 못해서가 아닐런지,, 하물며 육체에 바람이 든다면 정말 대책이 없을 것 같다.


바람든 부위에 파스를 붙일 수도 없고,, 시인도 사랑한다는 거짓말로 살기엔 가시가 너무 많다고 하지 않은가. 오금이 저릴 만큼 기막힌 표현이고 그의 싯구들이 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더듬을 때마다 황홀한 오르가즘을 느낀다. 정액같은 감동을 쏟아내자 창 밖에서 바람소리가 들린다. 문 쪼매 열어 봐라. 가을이 벌써 갈 채비를 하는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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