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십일월의 노래 - 이상국

마루안 2017. 11. 3. 13:19



십일월의 노래 - 이상국



십일월은 가을의 식민지,
무능한 정부는 늦게 온 꽃들마저 시들게 하고
돼지감자를 살찌운다


망명지의 커피집
문짝에 적힌 대로 전화를 하고 한참 기다리자
주인은 어디선가 늙은 차를 몰고 온다
식민지에는 마약이 따로 없다


날이 차고 무는 바람이 든다
나도 나에 대하여 할 만큼 했으므로
소설(小雪) 지나 한 날 송창식이나 부르며
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제국의 햇빛은 보드까처럼 희고
산천은 벌써 기가 죽었다
그때야 그랬다 하더라도 누가
저 산그늘 속의 버섯이나
풀잎들의 노래를 기억이나 하겠는가


그래도 날마다 가을이다
당국의 허가도 없이 식민지 시인들아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쓰러지는 꽃들을 위로하지 마라,
이렇게 불온한 시절도 가고 나면 그만이나


십일월이여
나는 아직 더 갈 데가 있다



*시집, 달은 아직 그달이다, 창비








상강(霜降) 무렵 - 이상국



누군가는 길어도 마흔 전에
생을 마감하는 게 좋을 것 같다*지만
나는 이미 거기를 지나온 지 오래


이웃집에 그늘이 든다 하여 기르던 오동(梧桐)을 베어내고
그 그늘에서 봉황을 기다리던 가을


살려고만 하면 누가 못 살겠는가
나는 나에게 좀더 다정할 수도 있었으나
기다리던 다정은 언제 오는가


가을 하나를 건너는 데도
나무 이파리들에겐 몇대(代)의 적공(積功)이 필요한데
제대하는 아들은 스물 세살
부모님 계신 가산(家山)의 퉁갈은 장끼 눈처럼 붉다
그래도 생은 모른다
언젠가 한번 다녀가라는 여자도 있었고
깨알 같은 시로 세상을 걱정하며
그때야 무슨 말을 못했겠는가


깨끗하구나 처연(凄然)이여
맑은 날 하늘에 몸을 씻고
벌레들은 땅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바짓가랑이를 걷고 다시 푸른 저녁을 건넌다



*요시다 겐꼬오 <도연초>에서





# 시월 하순에 상강, 십일월 초순에 입동, 하순에 소설, 이 기간이 되면 나는 바쁘다. 겨울 식량을 위해 부지런을 떠는 다람쥐처럼 나의 여행 일정도 부산해진다. 사람들로 북적였던 바닷가도 한산해지고 산길도 떨어진 낙엽으로 고요함을 덮는다. 만산홍엽의 저 산들도 곧 옷을 벗고 겨울 채비를 하겠지. 나에게 십일월은 세월의 무상함과 여행의 기쁨이 함께 교차한다.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잎은 모두 떨어지고 홍시만 달린 감나무와 들녘의 마른 풀밭 위에 서리가 내린 풍경을 만나면 코끝이 찡해온다. 특히 미처 거두지 못한 김장 채소밭에 내린 서리는 얼마나 가슴을 시리게 하던가. <나무 이파리가 몇대의 적공으로 가을 하나를 건넌다>는 싯구에 탄복하며 갈 데 많은 나의 십일월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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