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비 - 이은심

마루안 2017. 10. 3. 13:05

 

 

가을비 - 이은심

 


하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이름만 중얼거린다
오후 세시에 불려나온 그대는
젖은 꽃잎 위에 아슬히 서 있다

 

이름 모를 마을에서 점심을 먹는다. 처음 들른 식당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끓여주는 국밥 한 그릇. 들여다볼수록 낯선 그 처음을 수저질하며 버즘나무 이파리가 큰 새처럼 떨어지던 가을을 생각한다. 한 번의 환희와 수십 개의 절망이 소리 높여 휘몰아치던 격정의 순간들을. 편두통이 아니라면 그냥 지나쳐버렸을 휘파람 같은 가을, 그 깊은 곳에 서서 이제 그대가 나의 그리움이 되면 안 되나. 실성한 사람 하나쯤 키우고 있을 법한 마을에서 그대가 나의 처음과 나중이 되면 안 되나.

오후 세시에 상벌(賞罰)처럼 가슴을 때리고 가는

입술 새파란 비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가을 - 이은심

 

 

가을로 가서

그 이마 맑은 가을로 가서

한 개의 사과로 얼굴 붉혀야겠지

가만가만 불러도 왈칵 다가오는 그리움을

광주리에 담아도 봐야겠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는데

막무가내 달아올라서

먼 눈빛 속에 서 있기만 했는데

몸에 단물이 고여 와서

 

잘 익은 가슴을

잠그는 걸 깜빡 잊고 있을 때

그때 뜨거운 숨을 훅 들이마시며

사랑이 지나가겠지

 

하느님의 손이

처음 익은 열매를 따 내리는 과수원에서

햇빛과 눈 맞춘 죄로

나의 노래도 언젠가는 끊어져야겠지

 

 

 

 

# 이은심 시인은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2003년 <시와시학>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오얏나무 아버지>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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