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훌훌 다 털고 - 조항록

마루안 2017. 8. 28. 13:23



훌훌 다 털고 - 조항록



그가 떠났다


그는 지나간 계절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으리라
무얼 기억한다는 것은 돌이키지 못할 시간을 저미는 것
몇 번의 구애, 몇 번의 무기력, 몇 번의 불안, 몇 번의 몽환, 몇 번의 전속력,
세간을 들어내면 빈 방에 남는
응어리 같은 한 움큼의 먼지
그와 동거했던 계절들은 냉정한 흔적을 남겼다


돌아오지 않겠다며 손을 흔드는
그의 환한 뒤통수
흔들거리는 어느 먼 나라의 이정표


그가 떠난 오후가 청춘보다 짧게 머물고
창 밖에는 한창 밤바람이 분다
착시(錯視)보다 무서운 착음(錯音)
그가 묻는가
당신이 입으로 가져가는 한 숟가락의 밥과
당신이 당신 가슴에 쏟아붓는 한 줌의 비밀 중
어느 것이 더 반짝이느냐고
지금 당신의 계절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진창이냐고
거기서 얼마나 더 거짓말을 하며 살겠느냐고


오랫동안 망가진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당신이란 겁 많은 비둘기
훌훌 성긴 날개를 털며 해묵은 것들만 풀썩인다



*시집, 거룩한 그물, 푸른사상








처서 - 조항록



문득, 여름이 가네
귀가하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바라보다
지구에는 60억의 인명(人命)이 산다는 생각
호랑이 목숨, 지렁이 목숨, 매미 목숨,
파리 목숨,
강아지풀 목숨까지 다 더하면
60억이 한참 넘는 헛것들이 산다는 생각
어느 것 하나 슬쩍 지워진다고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는데
헛것들이 흔들리며 쏟아놓은 숨결이
한여름 한낮 땡볕의 열기로 이글거렸을 거야
지구는 하루가 다르게 뜨거워지고
우거진 수풀 사이로 마른 강이 보이고
헛것들이 헛것들을 염려하며 안부를 묻는데
맑은 눈망울을 껌벅이며 집으로 돌아간 학생들은
오늘 밤 어디쯤에 또 밑줄을 그을까
기다림보다 멀리 있는 순한 햇볕을 그리며
문득, 끝날 것 같지 않은 한 시절을 살까





# 아직은 매미소리 요란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예감하게 한다. 봄은 남쪽에서 오지만 가을은 북쪽에서 오거늘,, 바람이 데려온 가을 냄새를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처서 지난 이 시기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우울한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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