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 등나무꽃 그늘 아래 - 김명인

마루안 2017. 6. 9. 14:35



저 등나무꽃 그늘 아래 - 김명인



오늘은 급식이 끝났다고, 밥이 모자라서
대신 겁라면을 나눠주겠다고,
어느새 수북하게 쌓이는
벌건 수프 국물 번진 스티로폼 그릇 수만큼
너저분한 궁기는 이 골목에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부르면 금방 엎어질 자세로
덕지덕지 그을음을 껴입고
목을 길게 빼고 늘어선 앞 건물도 허기져 있네
나는, 우리네 삶의 자취가 저렇게 굶주림의 기록임을
새삼스럽게 배운다, 빈자여,
등나무꽃 그늘 아래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며
우리가 무엇을 이 지상에서
배불리 먹었다 하고 잠깐 등나무 둥치에 기대 서서
먹을 내일을 걱정하고, 먹는 것이
슬퍼지게 하는가
등꽃 서러움은 풍성한 꽃송이 그 화려함만큼이나
덧없이 지고 있는 꽃 그늘뿐이어서
다시 꽃필 내년을 기약하지만
우리가 등나무 아랫길 사람으로 어느 후생이
윤회를 이끌지라도 무료급식소 앞 이승,
저렇게 줄지어 늘어선 행렬에 끼고 보면
다음 생의 세상
있고 싶지 않아라, 다음 생은
차라리 등꽃 보라나 되어 화라락 지고 싶어라



*시집, 길의 침묵, 문학과지성








밤 두시의 전화 - 김명인



누군가 잠결의 한 자락을 흔들어놓고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개새끼!


나직하게 늙은 뻐꾸기가 두 번 울고
창밖으로 개들이 몹시 짖어댔다
어떤 불꽃은 세월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사그라든 뒤에도 마음의 진피로 닦아내야 하는
짙은 그을음,
누군가 깨어 있다!
저 뻐꾸기 속의 불멸이
내 생을 두렵게 한다, 나는 비로소 낮은 흐느낌에
회오를 다하여 답하여야 한다
시간의 자랑은 젊음이었을까, 광기였을까
몸으로 새긴 기억들이 모공을 일으켜
감당하기 힘든 증오 결대로 세워놓고
삶은 무수히 해져갔다, 그럼에도 나는
무슨 수로 씨앗의 처음에 가 닿으려 하는가
창밖에는 분명 어떤 서성거림이 있었고
개가 짖고, 한 희미한 검은 얼룩이
절망을 끌고 골목 저켠으로 사라져갔다
모든 파문이 되어 밤새 밀려왔는지
가등 아래 아직도 어른거리는 불빛 그림자!


이제 돌아보는 사람은 벌써 후회하는 사람이다
이제 뉘우치는 사람은 이미 아픈 사람이다
무슨 실마리로 흔적뿐인 시간을 꿰매느라
저렇게 불빛 그림자 더듬으며
홀로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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