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락의자, 작별 인사 - 박판식

마루안 2017. 5. 31. 22:03

 

 

안락의자, 작별 인사 - 박판식


어깨가 잘리는 꿈을 꾸었다, 울어야 하기 때문에 여자는 종교를 믿는다고 했다
반미치광이 여자는 할인점에서 우산을 접었다 펼쳤다 하고
석조 건물이 눈보다도 더 반짝거렸다
벚꽃보다는 사쿠라라고 발음할 때, 그는 지난날들을 더 믿을 수 있었다
아름답고 순진한 소년을 사쿠라라고 하면 안 되나
재봉사인 그는 사랑의 감정이 나일론 실과 같다고 믿었다
파업에 동의한 대가로 그는 직장을 잃었다
목적도 없이 불 꺼진 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뒤틀어진 빵처럼 개울은 딱딱했다
비뇨기과 질병과 신경통이 그를 괴롭혔다
교외의 하늘은 날카롭지 않아 좋았다
훤하게 밝아오는 도봉산, 산타 루치아를 부르면서 저 다리를 건너도록 하자
우울증도 때로는 타락이다
개울은 지식의 천사처럼 그에게 새삼 고독을 깨닫게 만들었다
얼어붙은 심미주의자처럼 개울과 다리는 화해했다
수위는 꾸벅꾸벅 졸면서 그날 새벽을 대단한 사건의 현장인 양 지키고 있었다
깨진 그릇 때문에, 그 하찮은 접시때문에 잠시나마 죽어야겠다고 결심했던 하녀처럼
그는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고 있었다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민음사

 

 

 

 

 

 

지나간다 - 박판식


어느 가을날, 너의 입술은 독이 가득 든 벌침
너의 심장은 온실 없는 정원에서 생강 뿌리를 갉아먹다 지친 재색 쥐
추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너는 왜 자꾸 감자 싹을 잘라 버렸을까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새들의 독감이 유행하던 날들이었다
쌀쌀한 날씨 때문에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는
그러나 서로를 미워하는 멧새들처럼 우리는 사랑했지
결말은 언제나
천둥이 치더니 장대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떴다는 식이지
일본식으로 드디어 에도시대도 저물었군, 하고 중얼거릴 만한 낭만적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던가
갈대 사이로 불던 바람이 도시의 사람들 사이에도 분다
그러나 바람은 가을의 화환을 묶다 말고 사라진다
한밤중 달을 보고 짖는 개의 그리움과
무리를 쫓아가지 못한 병든 기러기의 노래를 입술에 담고
가을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