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뭉쳐지지 않는 구름 - 이승희

마루안 2017. 5. 28. 16:48



나는 뭉쳐지지 않는 구름 - 이승희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창문 주름진 커튼으로 서서
교외의 버스 정류장 낡은 광고판처럼
색이 바래 죽는 일
그리워했고


뭉쳐지지 못해 공중에서 말라 죽는
구름에 대하여 생각하는 저녁
표지 뜯겨진 채 버려진 책의
얼굴을 가만히 넘겨보다
맨드라미 씨앗처럼 까만
눈동자만 그리워하던 날들의
부드러운 호흡
기록으로 남지 않을 시간들을 보았다


집을 떠날 때 두고 온 맨드라미는
가끔 전철을 타고 왔다 갔다
침대에
창문에
맨드라미 발자국으로
물든 방
아 저 붉은 입술
책상 밑
장롱 속
서랍 속에서
눈물처럼 빛나네
그림자조차 붉게 아프네


맨드라미 밥 먹이고
맨드라미 옷 입히고
맨드라미 손목 잡고 집에 가는 길
멀고 멀어서
나 맨드라미로 지고 싶네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막막함이 물밀듯이 - 이승희



이 막막함이 달콤해지도록 나는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모른다. 헛된 예언이 쏟아지도록 나의 혀는 허공의 입술을 밤
새도록 핥아댔다. 막막함이여 부디 멈추지 말고 나의 끝까지 오시길, 나의 온몸이 막막함으로 가득 채워져 투명해질
때까지 오고 또 오시길 나 간절히 원했다. 나는 이미 꺾이고 꺾였으니 물밀듯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길. 그리하여 내
게 남은 것은 나뿐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미 낡아버린 루머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내 몸속에 새겨주시길. 내
피가 아직도 붉은지 열어보았던 날 뭉클뭉클 날 버린 마음들을 비로소 떠나보냈듯이 치욕을 담배 피우며 마음도 버
리고 돌아선 길이 죽고 싶다는 말처럼 깊어지도록 밀려오시길. 막막함으로 밥 먹고 사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