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실없는 그 기약에 - 김왕노

마루안 2017. 5. 28. 16:27



실없는 그 기약에 - 김왕노



실없는 그 기약이란 말 좋지
지켜지든, 지켜지지 않든 하는 기약이란 것, 그런 기약이 희망이라는 것
기약이 깨졌다는 것은 마음을 담금질한다는 것
목숨을 건 기약이 있든지 말든지 기약이 있는 세상은
꿈이 있다는 세상,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이 간다는 것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는 날이든지 말든지
봄날이 가든지 말든지, 깨어지더라도 깨어지기 전
사금파리 같은 사랑이 반짝였다는 것, 비늘 반짝이는
버들치 같은 사랑의 말이 있었다는 것, 꽃 편지 던지든 말든
아 아 기약이 있었다는 것, 파르르 떨며 새끼손가락 걸었다는 것
그리운 실없는 기약이란 것, 깨지더라도 기약이라는 것



*시집,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천년의시작








선운사 동백, 그년 - 김왕노



선운사 동백, 그년 뚝뚝 떨어져도 내숭이다.
조이고 조여 사내들 다 조질 년이다.


안으로 잉걸불로 다지던 혼자만의 사랑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라
제 몸 제가 봇 견뎌
누룩뱀처럼 붉게 우는 화냥년이다.


선운사 목탁 소리에 리듬을 탄 듯 몸을 흔들며
사내들 화염지옥 적멸보궁 다 맛보여주는 년
사내들 들었다가 놨다가 하는 선운사 동백, 그년
너무 부끄러운 듯 선홍빛 얼굴을
동백 잎 잎으로 가리지만
속은 용광로보다 더 뜨거워
사내 몇 오르가슴으로 이끌어
죽어도 좋다는 탄성 내지르게 하는 년이다.


가진 것 다 가져다 바쳐놓고도
정신이 홀딱 빠져서
선운사 동백을 노래하며
곳집 같은 세상에서 찾아간 사내들
화대로 사내들 목숨마저 아낌없이 바치게 하는
꽃뱀 중 꽃뱀이다.


아아, 그래도 선운사 동백 그년에게 가고 싶다.
땅으로 뚝뚝 떨어져 누워도
동백 꽃 냄새 푹푹 풍기면서 케겔운동 한다고
아래를 조였다가 풀고 다시 조인다고
얼굴 벌겋게 달아오른 그년


가서는 내 생이 다 망하더라도
쩍 벌린 그년의 아랫도리, 그 불구덩이 속에서
한 사나흘 빠져 허우적거리고 싶다.
한 줌 재가 되고 싶다.


선운사 동백, 그년, 그년 알고부터 내가 망가졌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선운사 동백, 그년
찰진 아래로 날 반겨줄 그년
내 숨통을 한 번쯤 끊었다가 이어줄 선운사 동백, 그년
감창으로 세상을 들끓게 할 그년





# 김왕노 시인은 1957년 경북 포항 출생으로 공주교대, 아주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 하십니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