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닥이 더 환하다 - 장시우

마루안 2017. 5. 27. 18:52



바닥이 더 환하다 - 장시우



바닥 치고 싶은 날
오래 가물어 바닥 드러난
매지호수를 더듬어 걷는다
종종 걸음으로 방향키를 새긴
물떼새 발자국이 연 바닥이 환하다
그늘진 둔덕에서
아슬하게 모로 선 소나무
닿지 못할 섬으로 가지를 뻗고
물에 잠겨 수직상승을 꿈꾸던
버드나무 하늘로 가지를 치켜올린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게 빠지는
진창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선 작은 나무
제 어린 꿈을 털어낸다
제 무덤 찾아 나선 저 나뭇잎
어쩌다 흐르는 여울 위에 떨어져
소심한 발자국을 남긴다
저 물도 흐르기를 멈추면
어느 퇴적층에선가 화석으로 굳어가리라
그 위에 나무는 소리 없이 무성하리라
사람이 만든 것, 세월이 만든 것
차곡차곡 쟁여 환하게 길을 연다
문득 몸을 연 뿌리 틈을 파고드는 저 나뭇잎
쌓인 것들 말없이 품어주는,



*시집, 섬강에서, 천년의시작








봄날은 갔다 - 장시우



또 하루가 지났다 벽시계는 멎은 지 오래, 달력은 날짜를 헤아린다 벽에 붙은 못 하나가 좁은 방을 지탱한다 구멍 뚫린 방충망으로 파리가 날아든다 타악! 벽에 붙어 박제되어 가는 오늘, 방충망은 햇볕을 칸칸으로 나눠 방바닥에 뿌린다 뒤척이던 그가 일어나 펼치는 벼룩시장 날줄 씨줄이 죽죽 그어진 어제 날짜 교차로, 동그라미 위에 가위표가 핏발 세운다 냄비 속 나무젓가락에 말라 버린 몇 가닥 남은 라면으로 다시 날아든 파리, 휴대폰을 열고 번호를 누른다 돌아 오는 통화 중 수신음, 쓰다만 이력서를 집어던진다 담뱃갑을 여는 손이 떨린다 남은 것은 한 개비의 담배, 일회용 라이터는 인색한 휴식을 건넨다 담배연기가 날아올라 허공을 낚아챈다 발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다 때가 슬은 잠바를 걸친다 신발 끈 풀어진 낡은 구두가 재촉한다


문을 열고 나가 현대고시원 현관문을 닫는다






# 장시우 시인은 1964년 부산 출생으로 상지영서대학 문예창작과와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원래 간호학을 전공했으나 등단 이후 본격적으로 문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시집으로 <섬강에서>, <벙어리 여가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