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큼 - 김명기

마루안 2017. 5. 25. 16:46



만큼 - 김명기



꽃 날리는 거리에서 당신을 생각해
하염없이 날리는 저 꽃들만큼


언제부턴가 내게 꽃이란
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날려가는 거지
그것만이 내가 기약할 수 있는 일이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란 이제 없는 말이지
다만 당신과 내가 기약의 생으로
아주 천천히 날려가는 것일 뿐
좀 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 미안한 시간들이지
당신
죽어도 좋을 만큼 볕 좋은 봄날을 기억하는지
그 '만큼'의 크기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내가 당신을 사랑하다 죽어도 좋을 만큼이겠지
이 계절 가슴속에 다 품어내지 못하는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란
내 온몸을 쿵쿵 두드리고 지나가는
당신의 또 다른 이름
특별히 명명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그저 흐드러져 날리는 저 꽃 같은 이름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전당


 






불편 - 김명기



저 들은
언제 순결한 설정이 있었던가


꽃들의 농성 파한 들판에
사카린 같은 볕이 지나고
구겨진 유인물처럼 검불이 뒹군다


순한 몸이라고
격정이나 격렬이 사라지지 않듯
태형 같은 바람 속에
그래도 빈 들은
빈번히 푸른 꿈을 꾸겠다


나 저 들판 같은 것인지 물어봐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드러누운
게으른 그림자 발치에
뜨거운 생성이었을 과거를
표백처럼 망각한 채
어쩌자고
이렇게 직립은 불편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