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를 기다리는 동안 새의 이마에 앉았다 간 것의 이름은 - 이현호

마루안 2017. 5. 27. 17:46



너를 기다리는 동안 새의 이마에 앉았다 간 것의 이름은 - 이현호



전생이 잠시 놀다 가는 것을 본다


구름을 가리킨 손가락이 먹빛으로 물들고 있다


지나간 내일의 도도새가 날았고


어제의 비나 눈이 내렸다, 너의 귓불 같은


여기 온 적 있는 저녁을 기억하는


날개들이 바람의 발목으로 자란다


멸종한 새의 울음을 휘파람으로 불러보는 일


소문 없이 첨예해지는 우리의 약속


멀리 바람의 발목을 어루만지던 작은 언덕이


둥글게 접었던 몸을 활엽처럼 편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붉게 어두워지는 정점


오늘은 는개 흩날리고, 너의 솜털 같은


널 만나지 않고도 날아오르는 것들에게 경례한다


기다림이 늦도록 앓는 지병이 됐을 때


새의 이마를 털어주며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문학동네








궤적사진 - 이현호



나를 치열하게 했던 착란들은 어디로 갔을까
창밖 가로등은 제시간에 불을 밝힌다, 여느 때처럼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저주하고 이유를 모르고 여전히 저주한다
불행하게 태어나는 건 없다는 당신의 말을
너 따위가 알까, 추락한다는 것
죽을 힘으로 뿌리치면 죽을 힘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인간을 향한 갈망을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맹목의 시간 속에
뜨내기 같은 마음의 바큇자국을 망망연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무서운 게 없어져버렸다
필연을 따라서
언제든 부고장 물고 이 천공으로 회귀할 철새들
너무 오래 삶의 객지에 노출되어 있었다


죽은 별들의 궤적사진에서 참혹한 선의를 본다
나의 불행은 누가 꿈꾸던 미래였을까



*궤적사진은 밤하늘의 별들이 움직이는 자취를 알기 위하여 카메라를 고정하고 장시간 노출하여 찍는 사진.





*시인의 말


이생은 전생의 숙취 같다.
술 취한 고아들은 잘 자고 있을까.
홀로인 사람에게선 때 이른 낙엽 냄새가 나서
돌아보게 된다.
인간의 마음으로
끝내 완성할 수 없는 영원이란 말을
나는 발음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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