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왜 나는 여기에 있을까 - 조숙

마루안 2017. 5. 25. 16:39



왜 나는 여기에 있을까 - 조숙



재취 온 작은 어머니는
그렇게 입 냄새 피우며
말을 하셨다


아파트 두 칸 건너 이웃집에서
놓친 끈 붙잡듯 아이 이름 부르며
매 맞는 소리
못된 년, 먹구름에 깔린 목소리


남동생 소식을 듣자마자
작은 어머니는
빗자루 들고 마당을 쓸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목 맨 아버지 물에 빠진 오빠
끝내 장가 못 간 남동생이
농약 마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구 엄니 아이구 엄니
입 냄새 피우며
검불 같은 어미만 찾았다


나는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걸까
기가 센 형제들과
굵은 조카들과
패혈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점점 어려지는 팔순 가까운 어머니
사이에서


두 칸 건너 아파트
퍽퍽 맞는 소리도 낮은 울음도
갑자기 소리가 뚝 끊기고 기척이 없다


기미가 얼굴을 뒤덮고있는 작은 어머니
첫날밤도 못 지내고
매만 맞다 쫓겨나고 아이구 엄니 아이구 엄니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조숙 시집, 금니, 연두출판사








알루미늄 창과 종이꽃 - 조숙



태백산보살집이 된 옥상 집
노루모산 털어 넣으며 진저리 치던 젊은 엄마는
난전에 앉아 목장갑과 화투를 팔고
같은 주소를 쓰던 옆집 아줌마는
칠흑 같은 연탄으로 이글거리는 불탄을 만들었다
무엇이든 팔아야 살았던 시장통
드르륵드르륵 셔터 내리는 자정마다
1번 국도 길가의 방안으로
어둠처럼 징징징
쌍시옷 격음 흐느낌 한판이 찐득찐득 올라왔다
고단한 새벽 첫차 휘발유 냄새는 알루미늄 창에 스며들고
도시까지 끌고 온 엄마의 항아리
빈 박스 사이에 엎어져 먼지를 덮어쓰고 아침 맞았다
찌지직거리는 아크릴 간판 뒷면에 둘러싸인 시멘트 마당
끙, 망할 놈 계단을 오르던
반신불수 아버지 세상을 종주먹질 하는 동안
10. 26이 지나가고
밤새 한강다리 넘는 탱크 지나가고
80년 5월 통행금지와 등화관제 지나가고
교복 칼라에 풀 먹이고 무거운 책가방을 쌌다
자줏빛 커튼 사이로 훔쳐보던 흑백 화면
대나무 이파리 같던 얼룩무늬 군인들
시멘트 벽 뚫고 총알이 날아올 것 같은 밤이 지나면
최루가스와 함께 서울대생들이 지나가고
방직공장 여직원들이 발가벗겨졌다는 소문도 지나갔다
무엇이든 팔아야 살 수 있던 하루
알루미늄 창에 붉은 태백산보살 모시고
끙, 망할 놈의 계단 오르내리는 늙은 엄마 집에는
붉고 하얀 종이꽃 화투장처럼 피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