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른손잡이의 슬픔 - 정일근

마루안 2017. 5. 17. 06:41



오른손잡이의 슬픔 - 정일근



오른손이 아프고부터 왼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오른손 왼손 평등하게 가지고 태어났으나
태어나면서 나는 오른손에 힘주며 세상을 잡았다
나는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았고
오른손으로 연필 쥐고 공책에 글 썼다
오른손으로 악수하고 주먹 날리고
오른손 새끼손가락 내밀어 사랑을 약속했다
우주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이라 믿었으니, 전지자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 가르쳤으니
왼손은 오른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왼손은 오른손에서 가장 멀리 잊혀져 있었다
오른손 아프고부터 왼손으로 세상을 잡아 본다
왼손으로는 지푸라기 하나 쉽게 잡히지 않는다
자꾸만 놓치고 마는 왼손의 미숙 앞에
오른손의 편애로 살아온 온몸이 끙끙거린다
오른손잡이도 왼손잡이도 절반을 잃고 사는 것이다
오른손잡이도 왼손잡이도 슬픈 사람인 것이다
손은 둘이 하나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두 손을 모아야 기도가 되듯이



*시집, 오른손잡이의 슬픔, 고요아침








다시, 중년 - 정일근



혼자 있으면 중후한 시간의 몸, 몸들이지만
모아놓으면 구겨지고 볼품없어지고
뒤집어진 내 뒷머리처럼 통속하다
누런 모자 쓰고 비닐 완장 차고
비상교육 받는 새벽 민방위 훈련장에서
몸서리쳐지는 이 중년
몸이 세상의 화엄 만드는 화음이라 믿었는데
이제는 소리가 될 수 없는 불협화음의 몸, 몸들
몸이 칼 되어 오와 열 맞추던 시절 있었는데
앞줄 옆줄 아무 줄도 맞춰 설 수 없는 세월 왔다
후줄근한 몸으로 내가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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