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경계를 넘어 - 송경동

마루안 2017. 5. 5. 19:26



경계를 넘어 - 송경동



나는 내 것이 아니다


오늘은 평택 쌀과 서산 육쪽마늘과
영동 포도와 중국산 두부와
칠레산 고등어를 먹었다


내 뼈와 살과 피와 내장과
상념도 실상 모두 이렇게
태어난 실뿌리가 다르다


그런 내가 한 가지 생각에만 집착한다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렇게만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도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햇빛처럼 쟁쟁해졌다가
물안개처럼 서늘해졌다가
산간처럼 첩첩해졌다가
바다처럼 평원처럼 무한히 열리는
모든 생명이 내 안에 살아 있다


나만이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이것은 내 것이라고 움켜쥐는 일도
갸우뚱한 일이다 내 조국만이 잘되어야 한다는 일도
치사한 일이다 양파도 알고
대파도 알고 쪽파도 아는 일이다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이 삶의 고가에서 잊혀질까 두렵다 - 송경동



가리봉2동 닭장촌에서 남부순환도로를 넘어 공단으로 가는 길은 고가뿐이었다 그 철근쟁이 어깨마냥 한켠으로 10도쯤 기울어진 계단, 6차선 순환도로 위에서 출렁거리다 꽈배기처럼 비틀려진 다리, 나도 그 고가를 비틀거리며 수없이 넘었다


그 고가 너머 한 닭장집 지하 끝방에 살았다 보증금 50에 월세 8만원 바퀴벌레와 쥐벼룩이 혼거하던 방 슈퍼집 외상 장부에 씌어지던 라면과 부탄가스.... 여덟 개의 칸막이 닭장 위에 툭 트인 안방과 마루를 가진 주인 여자는 가끔씩 방문 앞에 서서 가지 않았다. 월세를 내지 않으려면 너의 젊음을 내놓으라는


그 방에서 때론 네 명이 부침개를 해먹고, 다섯 명이 술잔을 돌리고, 여섯 명이 자기도 했다 나는 그 지하에서 맑스와 레닌과 모택동과 호찌민과 중남미혁명사와 한국근현대사를 월경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유했다 그러다 지치면 살갗이 벗겨지도록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수음을 하곤 했다


아침이면 다시 지하방에서 솟아오른 사람들이 공단으로 피와 땀을 팔기 위해 활기차게 넘던 그 고가, 그 길밖에 없었던, 젊은 날들을 다 보낸, 지금은 테크노 디지털밸리가 된 굴뚝 공단에 흉물처럼 남아 있는, 나처럼 남아 있는, 나는 아직도 그 불우하고 불온했던 삶의 고가에서 내가 잊혀질까 두렵다






# 송경동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시집 말미에 다소 긴 문장이 시인의 말에 실렸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우연히 오게 되었지만,,,,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또 어떤 문장에선가 이런 구절도 썼다. < 가장 가파른 곳에 서본 사람들은 안다. 관념보다 귀한 게 물질임을, 노동이 사람을 얼마나 사람답게 하는 것인지를>,, 진정 그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참 노동자고 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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