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너다 - 황지우

마루안 2017. 5. 3. 00:18



61 - 황지우



태어나자마자, 나는
부끄러웠다.
깨복쟁이 때 동네 아줌마들이 내 고추를 따먹으면
두 눈을 꽉 닫아버렸다.
국어 시간에 젤 싫었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국어가 안 보였다.
여러 사람은 나의 공포였다.
처음으로 수음을 실시한 사춘기 때부터
이 부끄러움은 약탈, 동성연애감정, 광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변성기 안 온 앞좌석 놈을 꼬여 입을 맞추고
다음날 그놈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미류나무 숲 소나기 속으로 뛰어갔고
내가 싫었다.
담배, 술, 또 수음, 자살계획, 폭행.
승려가 될까? 항해사가 될까? 직업 군인이 되려고도 했다.
선생에게 대들었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선생을 무서워했다.
스무 살, 나는 하늘만큼 커졌고 무지무지하게 방종했다.
나 이외는 아무도 없었다. 거만했고 안하무인이었다.
나보다 더 잘생기고 인생공부 많이 한 놈은
일보 앞으로 나와봐!
군대, 육군 쫄다구, 송충이 하나 둘 셋 넷, 나는
송충이만큼 작아졌고 무지무지하게 작았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인칭이었다. 여러 사람 속에서,
나는 새빨갛게 부끄러웠다.
감옥엘 다녀와도 부끄러웠고,
이후, 나이 들고 시인의 아들딸을 두고
지끔까지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다.
살아가는 날들 앞에 두고, 전라도 말로,
무장무장 여렵다.



*황지우 시집, 나는 너다, 풀빛








17 - 황지우



내가 먼저 대접받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대안(對岸)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뿐!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 나는 너다, 풀빛출판사, 1987 초판으로 30년 전에 나온 황지우의 세 번째 시집이다. 나는 1999년 15쇄 판을 갖고 있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홍정선이 무지 띄어주는 발문을 썼다. 시집 제목만 나는 너다고 시에는 제목이 없고 숫자로만 되어있다. 숫자의 순서도 없다. 맨 첫 시가 503이고 마지막 시가 205다. 숫자가 시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시를 읽으면서 숫자를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시인은 알까? 시인도 시집 초입에 <없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에 대해 설명한다. <제목을 대신하는 숫자는 서로 변별되면서 이어지는 내 마음의 불규칙적인 자연스러운 흐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기록하는 모든 형식들에 관심이 몰려있던 그 당시 나로써는 電文을 치며, 火急하게 아무거나 詩로 퍼담으려는 탐욕에 급급했던 것 같다. 지금 보니, 냉냉하다. 활활 타오르는 시를 언제쯤 쓸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 꼴리는 대로 썼단 얘기다. 나도 꼴리는 대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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