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천명의 반칙 - 조재형

마루안 2017. 5. 3. 00:09



지천명의 반칙 - 조재형



판례와 도리를 개무시하고 치외법권을 노린다
불륜이 노릇노릇한 숯불 위에 윤리의 솥단지를 내건다
화끈한 날파람으로 모텔을 들락날락거린다
짝퉁 가방에 허례의 가면을 구겨 넣는다
신분으로 위장한 호기를 꺼내 입는다
삼색 신호등을 눈감고 범칙금을 연체한다
제세공과금은 기한을 넘겨 가산세를 키운다
곱빼기 정식을 점잖게 주문하고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다려준 와이셔츠에 티켓다방의 립스틱을 끌어들인다
나비넥타이 밑에는 표절한 자작시를 꽂는다
이마에는 붉은 선글라스로 색깔론을 표방한다
중도보수를 자처하는 착한 동료들에게는 시치미다
마지막 날은 묻지마 관광버스를 탑승한다
헌책방의 음모서적을 여의도의 지루한 방청객에게 배부한다
대여료는 온 국민의 쌈짓돈 세비로 충당한다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 지혜출판








지문을 수배하다 - 조재형



글구멍이 막혀 살아온 농투성이, 말년에 인감을 내러 면사무소를 찾았다. 직장에서 말소된 자식의 생계를 복원해주려 남은 천수답을 내놓은 것,


맨몸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랴 중노동이 열손가락을 갉아 먹었다. 십지문이 실종되었다고 민원은 반려되었다. 고추 먹은 소리로 삿대질 해본들 소용이 없다.


몰락한 가문의 정본으로 태어난 노인, 가난을 대대로 복사한 탓에 사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이면지처럼 남의 집 헛간을 전전하며


노인을 진본으로 탁본한 곳은 땅이다. 논배미 밭고랑 갈피마다 삽과 괭이로 밑줄을 그었다. 땀방울로 간인한 흔적들이 그를 소명한다.


팔순 고개 완등하고 유효기간이 다해가는 상노인, 올봄도 황소가 끄는 쟁기에 첨부되어 논두렁으로 출석했다. 부록으로 어깨에 멘 삽날이 지문처럼 문드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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